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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27. 무덤에 가기 좋은 날씨였다

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10일 22시 55분




  무덤에 가기 좋은 날씨였다.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었고, 빗방울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해먹은 다음 한두 시간의 낮잠을 자고도 이후의 시간이 통째로 남는 오늘 같은 토요일이면, 읽을거리를 챙겨들고 조금은 먼 곳까지 혼자 산책을 나서게 된다. 이렇게 나선 지난달에는 운하변의 음식점에서 가에탕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 친구들을 만나고 꿈같은 저녁시간을 보냈었다. 시간여행만 없었다 뿐이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그 자체였던 그날. 오늘은 또 어떤 장면을 보게 될까.


  페르 라 셰즈(Père la Chaise)는 파리 동쪽에 위치한 공동묘지다. 하지만 이곳은 평범한 공동묘지일 뿐 아니라 국립묘지와 같은 기능도 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안치되는 여러 국립묘지들이 있는데, 이곳 페르 라 셰즈에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러 음악가, 화가, 작가, 정치인 등의 묘가 있어 그들을 기억하는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이곳을 찾는다. 물론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그저 좋은 산책길 혹은 공원이기도 하다. 공동묘지답게 아주 조용할 뿐 아니라 지대가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어 따로 마련된 공간에 앉아서 가만히 경치를 내려다 볼 수도 있다.


  꽤나 넓은 이 공동묘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여러 곳인데, 내가 들어선 곳은 북쪽 출입구였다. 높은 담 사이로 열려 있는 문을 통과하자 지도 팻말이 바로 보였다. 유명인들의 묘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찾아갈 수 있게 해놓은 지도였다.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다. 그 이름의 주인들이 묻힌 묘를 하나씩 찾아가는 일이 과연 필요한 일일까를 계속 고민하며 걷기 시작했다.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 그들의 무덤을 찾아간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묻힌 무덤에 가면 그이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유명한 건축물이나 공원 등을 찾아가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 들어 이상했다. 왜 꼭, 죽은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그러니까 나는 왜 에디트 피아프의 무덤을 찾으면서, ‘에디트 피아프는 어딨지?’하고 중얼거렸던 걸까. 아직까지 가족의 장례를 치러 본 적이 없고, 기독교 집안 중에서도 맨 아래 항렬인 탓에 성묘 한 번 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죽은 이의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만 봐왔다. 무덤을 앞에 두고 죽은 이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이상했다. 오늘에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묘지에는 나로서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덤들이 가득했다. 무덤에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는 일이 살짝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들 모두가 실로 너무나 아름다웠고, 또한 내가 느끼기에 고인과 유가족 모두가 실제로 그 무덤이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한 것 같았다. 무덤들은 모두가 각각 하나의 예술작품이었다. 아예 출입문까지 뚫려있는 작은 건물을 세워둔 묘들도 많았고, 그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이 되어있기까지 했으며, 모든 묘가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내게 평온한 안심 같은 것을 주었다. 사실 처음에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위에서 내가 영혼을 믿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같은 맥락에서 이미 죽은 사람의 죽은 몸을 잘 안치하고 또 그 장소를 애써 꾸미는 일이 꽤나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아직은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내 몸 전체를 연구 혹은 이식을 위해 기증하는 일을 오래 전부터 고려해오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의 근사한 묘들을 한참 보다보니, 그곳에서 다름 아닌 한 존재에 대한 깊은 존중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더할 나위 없이 슬픈 일이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결국 남는 것은 슬픔이 아닌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서로 다른 무덤의 모양새만큼이나 이곳에 누운 모두가 얼마나 서로 다르게 사랑받고 존중받은 사람들이었는지를. 오히려 포토샵으로 전부 똑같이 찍어낸 듯한 우리나라의 공동묘지가 매우 기괴하고 으스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똑같이 생긴 무덤에 묻힌 사람들이라고 해서 살아생전 더 사랑받지 못했을 리는 없지만, 모든 사람이 다 똑같기를 은근히 바라고 부추기는, 그래서 사랑과 존중의 모양새마저 다 고만고만하게 비슷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우연히 발견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무덤을 시작으로 ‘세기의 배우 커플’이라 불리는 시몬 시뇨레와 이브 몽탕이 함께 묻힌 묘, 아크릴판을 세워 금지해놓았는데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키스마크가 찍혀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묘, 꽃으로 예쁘게 장식된 에디트 피아프의 묘, 한 울타리 안에 나란히 자리한 몰리에르와 라 퐁텐의 묘, 그리고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묘까지를 찾아냈을 때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묘 옆에는 작은 공터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는 잔디와 벤치, 그리고 무엇보다 전면으로 파리의 경치가 내려다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쉬고 있는 중이었다. 그 중 한 명과 자꾸 시선이 부딪혔다. 그는 온 사방을 향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나 너무 관광객 같다고 비웃는 거야? 괜한 자격지심에 보이지 않게 눈을 흘기며 마지막 목적지인 발자크의 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마침 그도 벤치에서 일어나 내 앞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갈림길이 나왔지만 하필 그도 나와 같이 좁은 길을 택했고, 그의 걸음은 한없이 느리고 나는 자꾸만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곤 하는 탓에 잠시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걷는 모양새가 됐다. 결국 그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 처음이세요? 네, 처음이에요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 다음 질문에는 늘 그렇듯 죄송해요 프랑스어 잘 못해요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겠지 싶었는데 그는 바로 유창한 영어로 다시 말을 건네왔다. 그렇게 그와의 느릿한 대화가 시작됐고, 발자크를 찾아가던 중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발자크에게로 안내해주었다.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미국에서 10년 이상 거주했다고 했다. 페르 라 셰즈 근처에 살기 때문에 자주 이곳으로 산책을 나오곤 하며, 아닌 게 아니라 오늘도 지갑은커녕 핸드폰조차 가지고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그가 근처에 살면서 자주 이곳을 찾는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발자크의 묘를 시작으로 이곳 관리인인들 알까 싶은 다양한 이들의 묘를 내게 소개하고 안내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이라며 직접 발견한 놀라운 사실 하나를 공유해주었는데, 그건 바로 페르 라 셰즈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알퐁스 도데의 무덤이 여기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지막 수업>, <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그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것을 그가 직접 이곳을 산책하다 발견했다는 건 더욱 놀라웠다. 심지어 그를 따라가 보니 도대체 어떻게 발견한 건지 잘 상상조차 되지 않은 구석진 곳에 자리해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의 무덤은 그야말로 완전히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가건물에 그의 얼굴과 굵은 풀잎의 모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건 온통 거미줄에 뒤덮여 있는 상태였다. 페르 라 셰즈의 산책자는 그가 정말 그 알퐁스 도데가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며 휴대폰을 가진 내게 그의 생몰연도 검색을 권했고, 우리는 이 무덤이 바로 그 작가 알퐁스 도데의 것이 맞다는 것을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페르 라 셰즈가 문을 닫는 여섯 시를 앞두고 묘지 이곳저곳을 천천히 돌면서 그와 내가 나눈 대화는 이런 것들이었다. 내가 신을 믿기 때문에 신에 관한 소설을 한 편 썼노라고 말하자 그는 자신도 신을 믿는다고 대답하면서, 신을 믿는 일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요지는 인생의 많은 것을 신에게 빌면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건강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렇기 때문에 신과 단지 친밀해지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답했다. 내가 가족과 친구를 믿듯이 신도 믿어서, 무언가를 요구하는 기도도 할 수 있지만 때로는 심지어 신을 향해 욕을 할 수도 있는 그런 믿음. (물론 믿음에 관해서라면 끝도 없는 설명이 더 이어져야만 하겠지만) 여섯 시가 가까워오자 관리인이 출구에서 종을 치기 시작했는데, 내가 저렇게 전통적인 종류의 종일 줄은 몰랐다고 웃으며 말하자 그는 저게 폐장을 알리는 방법의 전부이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이 이 안에 갇히곤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믿기 힘든 이야기. 한번은 제법 어둑한 시간에 이곳을 걷고 있었는데, 웬 수탉 한 마리가 나타났더란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노인이 여기 왜 수탉이 있는지 아냐고 물어서 모른다고 답하자, 가끔 야심한 시간에 이곳에 몰래 출입해서 수탉을 제물로 바치며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너무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정말 그곳에 수탉이 있을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납득해야만 했다고 한다.


  비가 내리다 말다, 하늘이 갰다 흐렸다를 꾸준히 반복하는 가운데 그와 나는 페르 라 셰즈를 나서 바스티유 역 근처까지 걸었고, 잠시 어느 케밥집에서 요기를 한 뒤 바스티유 오페라 앞 운하와 그곳에서 선상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는 자기만 아는 비밀이니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내게 맛있는 와인의 종류나 밖에서 저렴하게 샌드위치를 사먹을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들을 알려주었고, 또 그가 내게 되풀이해 말한 것은 관광객이 아닌 손님을 만나게 되어 참 좋다는 것이었다. 나는 동의하며 말했다. 내가 프랑스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인 이유는, 이곳에 관광객으로 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가 아직 루브르도, 오르세도 가 보지 못했다고 하자 그는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가 충분히 용감하다면, 루브르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채로 한국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나는 웃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전철역 앞에서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서로의 이름을 물었다. 그의 이름은 여러 차례 되물어야 할 정도로 내게는 독특한 이름이었고 그 이름이 멋지다고 칭찬하자 베트남계 프랑스인인 그는 베트남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라며 겸손을 표했다. 그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해석하면, ‘보았다’라는 뜻이 된다. 음, 오늘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장면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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