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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28. 우리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11일 22시 16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흔히 환상으로만 치부되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완전히 무근거한 것만은 아니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 놓이고, 새롭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새롭고 낯선 경험을 하면서 세계를 넓히는 일은 실제로 내가 누군지를 점점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파리에 사는 한국인들은 늘 양쪽 주머니에 팻말 한 개씩을 넣고 다녀야 한다. 하나는 여기 산 지 얼마나 되셨어요에 대한 대답, 하나는 여기 어떤 이유로 오셨어요에 대한 대답.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갈 때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들이다. 약간씩의 예외는 있을 수 있어도, 대체로 그냥 이 나라에서 태어났겠거니, 그 후로 쭉 이 나라에서 살아오고 있겠거니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도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나는 왜 여기에 살고 있는지, 나는 무얼 위해 이곳에 오게 됐는지.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파리에 온 목적과 체류한 기간을 자꾸 설명하다 보면 그때마다 스스로에게도 묻게 된다. 내가 여기 왜 왔지? 나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나 왜 태어났지?


  5월 9일 파리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약 두 달의 시간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설명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문장 중 하나를 꼽자면 ‘새로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주 새로운 장소를 방문한다. 매주 새로운 일들을 겪는다. 하지만 그 중 제일은 역시 매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나는 매번 내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와 완전히 똑같은 생각과 목적과 습관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두가 저마다 서로와 다르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한 꺼풀씩 조각해간다. 나는 이런 사람은 아니구나. 나는 그런 사람도 아니구나. 나는 어떤 사람을 동경하는구나. 나는 저런 모습을 불편해하는구나. 나는 이건 좋아하고, 저건 싫어하고, 이걸 가치 있다 여기고, 저건 여전히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사람은 타인이 누구인지도 궁금해 한다. 내 이야기를 써나가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묻는다. 그래서 나는 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나를 알고 싶은 만큼, 내가 나를 내보이고 싶은 만큼.


  나는 늘 저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 이곳에서 이야기를 쓰는 사람. 그래서 당신을 너무 살리고 싶은 사람. 당신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사람. 오늘도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준 덕에 내 작은 생각들을 꺼내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당신의 삶을 질문할 수 있었던 사람. 우리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끝난 다음에도 다시 시작되기를, 알록달록한 가슴으로 기도하는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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