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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29. 잠들면 시작되는 꿈처럼

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13일 화요일 20시 59분




  기억이 지금보다 더 휘발되거나 왜곡되어버리기 전에 처음 한국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두 달 전을 회상해보기. 내 비행기는 5월 8일 어버이날, 자정 가까운 늦은 시각에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항공편이었다. 출국일을 묻는 친구들에게 날짜를 알려줄 때마다 ‘어버이날 선물로 사라져드릴 예정’이라며 농담을 하곤 했는데, 정말 두 분이 모두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준 덕에 실로 진한 어버이날을 보내게 됐다. 아주 떠난 것도 아니지만, 이날 공항에서 엄마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잊어버리기란 쉽지 않을 것 같고, 누군가 ‘사랑’의 장면을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아마 이 풍경이 선뜻 눈앞에 떠오를 것이다.


  못 본 사이 인천공항은 더욱 근사해져 있었다. 그리고, 예상보다도 훨씬 더 한산했다. 그 크고 넓은 공항에 사람이라곤 우리 셋밖에 없는 기묘함이 나는 많이 행복했다. 체크인 및 수하물 등록, 코로나19 음성결과지 번역, 약간의 환전 등 공항에서 볼 일이 몇 가지 있어 공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내가 아니라 엄마아빠가 떠나는 여행인 것처럼. 우리는 밤의 공항을 배경으로, 가족여행을 잠시 빌렸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먹고 싶던 음식은 물냉면이었다. 시원하고 텁텁하고 톡 쏘는 그 맛이 왠지 출국 전날 갑자기 떠올랐다. 공항 음식점에서 셋이 물냉면 세 그릇을 시켜먹었다. 손에 꼽을 만큼 맛없는 냉면이었다. 서운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으로써는 한국에 돌아가는 날 공항에서 그 맛없는 냉면을 다시 사먹고 싶기까지 하다. 이곳에서의 시간을 통해 나는 어쩌면 좀 달라졌을지라도, 그 냉면이 맛있게 바뀌어있다면 어쩐지 섭섭할 것 같다. 내가 떠나있는 동안, 한국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언제든 내가 안심하며 돌아갈 수 있게. 언제든 내가 돌아갔을 때 안심할 수 있게.


  혼자 비행기 타는 게 싫어지는 날이 언젠가 올까. 지상을 박차고 이 땅을 떠나 하늘을 날아서 저 땅에 내리는 엄청난 일을 나 혼자 맞는 일의 짜릿함이 과연 반감될 수 있을까. 자정. 비행기 안에서 내다 본 하늘은 어둡고, 활주로를 밝히는 노란 불빛은 환했다. 역시 비행기 내부는 한산했고, 모든 승객이 세 자리씩을 차지한 채 마음껏 앉고 누울 수 있었다.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여정이었다. 저 멀리 아주 천천히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까만 하늘 아래 이스탄불은 아름다웠다. 새벽인데, 손으로 슥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옅은 구름 아래로 샛노란 불빛들이 가득 반짝이고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이스탄불의 야경만큼이나 화려하던 이스탄불 공항에서 다시 파리행 비행기에 오를 때, 나 말고도 한국사람이 몇 사람 더 있는 것을 봤다. 아무도 나처럼 파리에 처음 가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시국에 파리로 가는 저들은 각자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을까? 혹시 프랑스에서 살아가다가 한 번쯤 다시 마주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저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잘할까? 속으로 이것저것 쓸데없는 물음을 묻는 동안 우리는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했고, 입국 심사를 마치자마자 그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공항 택시를 타고 삼사십 분 정도를 달려 앞으로 내 집이 될 곳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님께 말 걸던 내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나는 파리에 처음 도착한 두 달 전이나 시간이 좀 더 지난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집주인, 그리고 나보다 며칠 먼저 도착해 입주해있던 룸메이트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알리긴 했지만 이런 일을 예상하지는 못했었다. 아파트 앞에 도착한 택시가 트렁크 문을 열자마자 내가 내리기도 전에 웬 인상 좋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내 캐리어들을 막 빼가기 시작했다. 어, 저거 진짜 엄청 무거울 텐데. 그 사람들은 별 말도 없이 그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뭐 이쯤 되면 딱히 도둑은 아니겠으나 봉쥬르 한 마디 건네지 못한 나는 그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그들을 따라갔다. 이들의 정체는 집주인인 올리와 올리의 가족들. 이들은 이후로도 한동안 자주 집에 찾아와 나와 룸메이트를 위해 많은 것들을 살펴주었다. 얼마 전 멜론이 요즘 제철이라며, 어떤 멜론을 어떤 기준으로 사야 하는지까지 알려준 사람도 올리였다.


  실제로는 이 날 처음 보는 것이었던 룸메가 내 옆방에서 빼꼼히 나를 보고 있었다. 잔뜩 상기된 목소리와 동작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던 나에 비해 차분한 모습으로 낯을 가리던 한나. 나는 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한나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구글맵 스트리트뷰로 봤던 거리에 서자 모든 것이 장난 같았다. 내가 아주 작아져서 지도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기도 했고, 입장료를 내고 영어마을 같은 곳에 입주한 것 같기도 했다. 복잡한 파리 시내가 아니어서인지, 새로운 곳임에도 여행이나 관광을 온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프랑스에 와 처음 먹은 것은 파리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케밥이었다. 실수투성이지만 당당한 불어로 세트를 포장해서 센 강변에 갔다. 집에서 센 강까지 걸어갈 수 있다니, 이런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었는데.


  연석에 나란히 앉아 강바람을 맞으며 케밥을 먹던 이 날 이 순간, 나는 스스로가 프롤로그의 한복판에 서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내 인생은 책이고, 이제 막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지금은 1장이 쓰이기 직전의 프롤로그. 이번 시리즈가 어떤 장르일지는 예측할 수 없으나, 그것이 스릴러래도 코미디래도 멜로래도 액션이래도 오늘 같은 시작이라면 아무튼 좋다. 너무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보게 될 테니. 예고편을 보고 관람할지 말지 결정하는 개봉영화와는 달리, 이 시리즈는 그저 잠들면 시작되는 꿈처럼 모든 순간을 다 직접 경험하게 되는 종류의 것이니까. 스물아홉. 자꾸 뭐든 마지막인 것처럼만 느껴지던 해에, 아주 새로운 다른 것이 시작되었다. 이맘 때 찾아온 시작이라 유독 더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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