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칸 시간으로 7월 15일 16시 14분
남프랑스에 도착한 지 30시간만에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싱크가 안 맞는다. 말소리가 입모양에 비해 조금씩 처지는 영화처럼, 전개를 따라갈 순 있지만 내내 불편하기 짝이 없다. 속도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느릿한 이곳 남프랑스라는 배경과, 분 단위로 바쁘게 돌아가는 페스티벌의 속도가.
운 좋게 칸 영화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칸 영화제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 베니스 국제 영화제와 함께 꼽히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매년 5월에 프랑스 남부 해안도시인 칸Cannes에서 열린다. 다만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개최가 취소되고, 이번 연도 역시 상황이 불투명했으나 결국 이례적으로 7월에 개막하게 됐다. 2019년, 그러니까 직전 회차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최고상인 황금종려상Palme d’Or을 수상하던 때가 기억난다. 이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포함한 전세계 수많은 영화제에서의 수상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기생충 및 봉준호 열풍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한국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 장면이나 소식이 더 크게 알려진 편이었고 나 역시 이날 생방송을 지켜보면서 이동진 평론가 못지않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이보다 훨씬 앞섰던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 영화제이긴 하지만, 갈수록 다른 두 영화제에 비해서도 확연히 위상을 더해가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꼽히는 것이 바로 칸 영화제이다. 영화 좋아하는 일반인으로서의 내 주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도 늘 같은 느낌이었다.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의 선정 기준은 대중성보다는 예술성에 맞춰져 있는 느낌이라 수상작들이 대체로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수상작을 보게 되더라도 이게 뭔 영환지 얼른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편이었다. (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거지 베를린에서 수상한 영화가 전부 난해하고 노잼이란 얘기는 절대 아니다)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 리스트를 쭉 살펴보면 언뜻 봐도 베를린보다는 대중적인 기준을 갖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일까)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은 이상할 정도로 그다지 기억에 남지를 않았다. 한국인으로서 홍상수 감독이 거의 해마다 베를린의 초청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내겐 어쩐지 베를린은 홍상수, 같은 이미지로 각인돼버렸고, 베니스의 최근 최고상 수상작들은 대부분 한국에서도 주목받은 작품들(<조커(2019)>, <로마(2018)>, <셰이프 오브 워터(2017)> 등)이다 보니 체감되는 영화제만의 색깔이 어쩐지 무뎌지고 만 것이었다. 반면 칸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한 영화들은 비교적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균형 있게 갖추고 있는 작품들로, 신기할 정도로 수상작들이 내 취향에 딱딱 맞아왔더랬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예외는 많지만, 대체로 내가 ‘이 영화는 가히 최고 수준이다’라고 생각하면 황금종려상 수상작이곤 했다) 그러니까 칸 영화제는 보편적으로 볼 때 세계 최고의 영화제인 동시에, 내가 개인적으로도 관심과 호감을 갖고 있는 영화제였던 것이다. 프랑스에 가면 칸 영화제에도 가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성을 따져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영화제를 한 달여 앞둔 시점, 누군가 다짜고짜 물어왔다. 너 근데 칸 영화제는 안 가?
‘그들만의 축제’로 오랜 기간 유명했던 칸 영화제가 일반인들에게 그 문을 개방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 ‘칸에서의 3일3 days in Cannes’이라는 배지를 새로 기획해 영화계 종사자나 영화 관련 학생이 아니어도 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이면 누구나 영화제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신청 방법은 대단히 까다로울 것도 없지만 결코 간단하지는 않은, 커버레터 제출 및 원서비 지불이었다. 해당 프로그램의 운영 역사가 짧다보니 워낙 정보가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대충 내가 얼마나 영화에 미친 사람인지를 과장 조금, 거짓말 조금 보태 A4 한두 페이지 가량 적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한 차례 교정을 받은 뒤 제출 페이지에 업로드하자 사전에 어떤 공지도 없었던 원서비 지불 창이 나타났고, 혹시 신청이 반려되더라도 돌려받을 수 없는 약 3만원 가까운 비용을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제했다. 다행히 내 신청은 머잖아 승인되었고, 나는 숙소와 비행기를 예약했다.
당일까지도 칸에 가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아마 갈 거야’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영화제를 아는 사람들은 그 나름, 남프랑스를 아는 사람들은 그 나름으로 많은 감탄과 축하를 보내줬다. 돌아보면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집에서 영화를 볼 때 OTT 서비스를 이용하는 요즘은 그런 일이 없지만, 영상과 자막을 각각 다운받아 플레이어 프로그램으로 재생해서 보던 시절에는 영화와 자막 싱크가 안 맞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대부분 처음부터 틀리진 않는다. 가만히 보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러다 머잖아 대사와 자막의 타이밍이 완전히 서로 벌어지고 만다. 남불 정말 아름다운데, 너무 좋겠다. 진짜 칸 영화제에 간다니, 대박이다. 둘은 이미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니스 공항에 도착한 뒤 숙소로 가기 전에 그 유명한 니스 해변을 한 번쯤 구경하고 싶었지만 루트가 애매했다. 하지만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인생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이사 와 노년의 하루하루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백발 주민들의 느긋함은 곳곳에서 보였다. 니스에서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려 기차를 타고 숙소가 있는 앙티브Antibes(니스와 칸 사이에 위치)로 가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던 바다의 풍경 또한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다웠다. 뜨거운 햇살 아래 앙티브의 골목은 조용하고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해먹과 흔들의자, 각종 장식품들로 가득 찬 숙소의 넓은 정원에는 큰 개들이 누워있었고, 그곳의 공기는 나로 하여금 영화제고 뭐고 그냥 나흘간 이 숙소에서 바닷가를 천천히 오가며 느긋하게 쉬다가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했다.
영화제에 관한 글을 이전에도 한번 쓴 적이 있지만, 영화제는 기본적으로 영화를 보러 오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체류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화를 보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분주한 스케줄을 짜게 된다. 주행사장을 기준으로 멀고 가까운 다양한 상영관에서 다양한 영화들이 우후죽순 상영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영화 시간을 체크하면서 중간 중간 남는 시간에 얼른 끼니를 해결하는 식이다. 그리고 칸 영화제의 보다 더 특별한 점은 바로 수많은 유명인사들의 방문. 세계적인 영화제답게 그야말로 세계적인 영화인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다. 어지간한 사람은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처음에는 기사들을 통해 어떤 영화인들이 언제 오는지를 확인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나에게 있어 그 실물을 보는 일이 가장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는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를 볼 기회를 이미 놓쳐버린 이상(나는 영화제 폐막일에 가깝게 이곳을 방문했지만 그 둘은 개막일에 볼 수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야 못 본대도 그저 어쩔 수 없음이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애초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칸 영화제 기간 동안 매일 뤼미에르 대극장Grand Théâtre Lumière에서 하는 특정 상영들에는 상영 전 레드카펫에서의 프레스 타임이 있다. 상영하는 영화의 감독 및 배우들은 물론, 초대받은 여러 유명인사들이 차를 타고 등장해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 레드카펫을 밟는다. 일반인들도 같은 상영관에서 함께 영화를 관람하지만, 대신 엄격한 정장 차림을 요구받는다. 칸 영화제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전통이다. 물론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이브닝드레스에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규정은 최근 몇 년간 많은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해서 현재는 제법 느슨해진 편이긴 하지만, 아무튼 기본적인 규칙 자체는 아직까지 바뀌지 않았다. 첫날 저녁, 처음으로 그 레드카펫 현장을 가까이서 봤다. 시상식도 아닌데 차단선과 직원들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는 구역을 따라 셀러브리티가 탑승한 고급승용차들이 한 대씩 도착하면, 영화관 건물 외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차에서 내려 레드카펫을 밟고 영화관으로 입장하는 스타들의 모습을 따라가며 비추고, 스타의 이름을 거듭 외치며 탄성을 보내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크게 울려퍼진다. 스타들의 입장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막간을 이용해 따로 구분된 라인을 따라 정장을 한 일반인들이 후다닥 레드카펫 한켠을 밟고 영화관에 입장한다. 그러다 또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차량이 등장하면 처음부터 다시 반복. 예전에 서울에서 청룡영화상 시상식 레드카펫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같은 레드카펫이지만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땐 아예 배우와 감독들만을 대상으로 한 시상식이라 비교대상이 없어서 그랬을까. 같은 장소에 같은 목적으로 들어가는 두 집단의 차이가 너무 확연하게 한눈에 들어오는 뤼미에르 대극장 앞 레드카펫이 영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요정 같은 하늘빛 드레스 속 샤론 스톤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카메라에 담다 조용히 장내를 빠져나왔다.
‘그들만의 축제’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가르침당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영화제의 분주함을 모르는 바 아니라고 생각했고, 낯선 파리지앵들과 부대끼며 두 달 남짓 살아오는 중인데, 해외와 영화제가 결합되는 순간 이토록 텁텁한 새로운 위화감이 모래처럼 입속에 씹힐 일이었던 건가. 껄끄러움의 이유가 해명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서 찝찝함까지 더해지는 상황에서 마침내 몇 시간의 여유가 생겨 젤라또 가게 앞 테라스에 앉았다. 마음먹고 챙겨온 노트북을 펴자 눈앞에 내가 주문한 젤라또, 글을 쓸 하얀 워드 화면,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영화제 손님들의 모습, 배경을 이루는 칸의 골목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목인 만큼 바쁘게 일하는 점원들과, 휴양지 컨셉 아니면 풀정장 차림으로 행사장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 나만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곳의 어느 누구도 온전히 이곳에 속할 수 없었다. 칸 영화제라는 이름 아래, 잠시 왔다가 떠나는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을 보러 온 사람들. 유명한 사람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해 바쁘게 준비하고 움직이는 사람들.
봉준호 감독은 이번 칸 영화제 개막식에 깜짝 등장해 개막 선언에 참여했다. 그는 ‘이곳에 모인 여러분을 보니, 팬데믹으로 인해 영화제는 잠시 멈춘 적이 있을지라도 영화는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음을 실감한다’는 말을 했다. 모두에게 낯선 땅에서, 서로가 낯선 이들이 모여 이룬 그 느슨하고 헐거운 연결고리가, 결국 한 가지만은 끈끈하게 이어가고 있다니 실로 흥미롭고 끝내 어색한 일이다. 빠르게 달리는 열차 안에서 내다 본 바깥 풍경이 문득 가만히 멈춘 듯 보이는 것처럼, 뭔가 아주 당연하면서도 기이한 일이 이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