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칸 시간으로 7월 17일 04시 09분
칸은 바로 칸 옆에 있었다.
셋째날인 금요일 아침에 예매해 둔 영화의 상영관은 주행사장에서 아주 살짝 밀려난 위치에 있었다. 지루했던 상영이 끝나자 들어올 때와는 다른 방향의 출구로 안내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방향감각을 상실했고, 그 상실보다 아름다운 것은 칸에서 지금까지 보낸 시간 중에 없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각종 매체들을 통해 내 머릿속에 새겨진 이탈리아나 그리스 풍경의 자매품이 이제 막 영화관 밖에서 상영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높은 성벽과 그 위에 우뚝 선 작은 성당, 깊게 푸른 하늘과 내리쬐는 햇볕,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미로처럼 가로지르는 좁은 오르막 골목들. 주행사장 쪽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자연스럽게 이 그림 같은 풍경이 이끄는 대로 정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주행사장 쪽에서 겨우 100미터 내지 200미터 정도 떨어졌을 뿐인데, 이곳에는 완전히 다른 칸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칸 영화제 말고, 칸 영화제라는 손님을 맞아들인 칸이라는 주인장이 슬며시 뒷짐을 진 채 한 켠에 물러나 있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이제, 좀 많이 눈부신 아름다움을 내뿜는 상태로.
많은 설명을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이곳이 저곳과 다르다는 걸 느끼게 해준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사람들의 미소였다. 사람들이, 웃는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다. 그들의 미소가 순수한 친절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이곳에도 저곳처럼 레스토랑들이 있었고, 여기에도 저기처럼 사람들이 테라스마다 앉아있었으며, 이 길에도 저 길처럼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저곳과 달리 이곳에서는 거기 있는 모든 이가 이 골목과 시간의 주인이었다. 겨우 몇백 미터를 사이에 두고 이곳과 저곳에 서로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기를 몇 번 반복하자 작은 성당 하나가 나왔고, 성당 앞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성벽 너머로는 바다, 도시, 그리고 바다가 보였다. 도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아니, 거짓말이다. 한눈에 결코 담을 수 없을 만큼 좌우로 넓게 트인 정경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 숨이 막히는 넓음. 복잡한 행사장과 그 속의 바쁜 사람들도 개미처럼 작게만 보이고, 배들이 정박해있는 가까운 바다부터 그 끝을 알 수 없는 저 먼 바다까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곳에 올라올 계획을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 한없이 놀라워하며 홀로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칸이 왜 칸 옆에 숨어있었던 걸까. 그것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어느덧 다음 영화 상영시간이 가까워 와서 슬슬 다시 복잡한 아랫동네로 귀환해야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다리가 아픈 건 둘째 치고 너무 배가 고프고 피곤했다. 그리고 더는 참기 힘들다고 생각하던 바로 어느 그 순간, 눈앞에 작은 빵집 하나가 나타났다. 빵과 커피를 시켜 매장 내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 동안 사장님과 간단한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 손님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느긋하고 여유 있는 가게 주인 덕분에 잃었던 인류애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여행은 늘, 예상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예상 못한 것을 마주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볼을 스칠 정도로 바로 가까이에 숨어있는 경우도 있다. 여행자가 할 일은 그저 그것들이 어쩌다 한 번씩 불현듯 손짓할 때, 놓치지 말고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 주는 것이다. 그럼 가끔은 이런 깜짝 선물을 한 번씩 받게 된다. 감히 예상조차 못할 만큼 근사한 그런 선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