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른 Oct 20. 2022

032. 여행의 본질은 돌아갈 곳이 있음이다 (3편)

2021년 칸 시간으로 7월 17일 14시 25분





  어느 정도 빡센 일정을 각오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루를 밤새면 이틀은 죽고 이틀을 밤새면 나는 반 죽는다는 다이나믹듀오 선배님들의 명언을 받들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루 최소 여섯 시간 이상의 취침을 유지해오던 온실 속 화초 같은 일상이었는데, 여긴 무슨 영화지옥이길래 사람을 하루 세 시간씩 자고 영화만 보게 만드는가.


  농담이다. 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까. 하지만 농담이라고 해서 거짓은 아니다. 밤에 거의 못 자고 하루 종일 덜 뜬 눈으로 상영관을 배회하는 좀비 상태로 며칠을 보내고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다양한 영화들은 몇 개의 섹션들로 분류가 되는데, 크게는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이 있다. 경쟁 부문은 말 그대로 디스 이즈 어 컴피티션, 경쟁을 통해 채점을 해서 부문별로 상을 주는 영화들을 말한다. 무슨무슨 영화제에서 무슨무슨 상을 탔다고 하면 그 영화제가 경쟁부문에 출품되었었다는 의미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비경쟁부문은 수상 대상이 아닌, 그저 해당 영화제에서 상영을 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큰 영광이고 기회가 되니까. 영화제에 따라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 내에서도 주제 혹은 국가에 따라 좀 더 세부항목을 나누기도 하는데, 그러한 섹션들의 이름을 쭉 훑어보면 해당 영화제가 올해 어떤 이슈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눈치 채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번 74회 칸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출품된 한국영화는 없었다. 다만 비경쟁부문에 두 편의 영화가 올랐는데, 한 편은 홍상수 감독의 새 작품 <당신 얼굴 앞에서>, 다른 한 편은 <더 킹(2017)>, <관상(2013)> 등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의 신작 <비상선언Emergency Declaration>이었다. 둘 다 국내에 아직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어서 <당신 얼굴>의 경우 이번에는 김민희가 스태프로만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 <비상선언>에는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김소진, 박해준 등 초호화 출연진이 함께했다는 것 정도만을 사전에 알고 있는 상태였다.


  이 두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은 뭐랄까, 내게는 의무 같은 것이었다. 이번 영화제에서 유독 관객과 언론에게 많은 주목을 받는 몇 편의 작품들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래도 다 상관없었다. 이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우리 영화, 우리 감독, 우리 배우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기적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렷한 한국어로 감사와 응원의 인사 한 마디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 정도. <당신 얼굴>의 일반상영은 어렵지 않게 예매와 관람을 할 수 있었지만, 금요일 밤 10시 15분에 예정되어 있던 <비상선언>의 상영은 다소 까다로운 부분들이 있었다. 해당 상영은 오랜 전통을 가진 칸 영화제의 메인 시어터라고 할 수 있는 뤼미에르 대극장Grand Théâtre Lumière에서 작품의 감독과 배우들을 초대하고 모두가 정장을 갖춘 채 영화를 관람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예매 역시 티켓 승인을 요청하는 리퀘스트를 보낸 다음 주최측에서 이를 허락하고 티켓을 발부해주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당일 오전까지 소식이 없어 포기하는 마음으로 있었는데, 점심 무렵 티켓이 발부되어 급히 자라 매장에 들어가 원피스와 힐을 구매했다.


  그 전날 똑똑히 보고 느꼈던 대로, 대극장에서의 상영과 직전의 레드카펫 행사는 철저히 게스트와 일반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는 늘 잠재적 테러리스트이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고, 그 모든 기분 나쁜 대우에도 불구하고 마치 설국열차의 꼬리칸에나마 간신히 육신을 싣고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그 카펫 위를 한번 오를 수 있다는 것, 그 극장 한 귀퉁이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그저 열심히 핸드폰 셔터를 눌러대는 존재들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고 사진을 안 찍을 순 없으니까.


  칸 영화제의 셀렉션이 대체로 내 취향에 맞는다고 고백한 지난 글의 내용이 민망할 정도로, 이곳에서 관람한 모든 영화들은 대체로 다 지루하기만 했다. 물론 한글 자막이 없어 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던 탓도 크고, 두 눈을 뜨고 얌전히 앉아있는 일이 한없이 버겁기만 한 피곤한 몸상태였던 것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비상선언>의 재미와 만듦새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내가 이 작품을 관람한 전세계의 몇 안 되는 한국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나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들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 영화에 관해 어느 만큼의 정보를 유포하는 게 가능한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아직은 말을 아끼게 된다.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언제든 이 영화가 개봉하거든 망설이지 말고 보러 가라는 것. 두 시간 반이라는 긴 러닝타임 내내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첫 시작부터 완전히 관객들의 멱살을 움켜쥐고 달려간다. 혹시 개봉 때 추가 편집을 거쳐 러닝타임이 줄어들게 된다면 나는 편집 전 버전을 봤다는 사실에 혼자 더 기쁠 것 같다.


  해외 영화제에서 영화 한 편의 상영이 끝나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몇 분 동안 끊임없이 박수를 치는 모습을 한 번쯤 뉴스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박수를 치는 마음은 알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을 그러고 있을 수 있는 건지 항상 이해가 안 됐었다. 현장에 있으니 완벽히 이해가 갔다. 영화의 제작진이 그 자리에 없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영화제의 모든 상영 때는 영화의 시작과 끝 시점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데, 심지어 감독과 배우들이 현장에 함께하고 있고, 영화가 큰 감동을 주었다면 그 마음을 그 자리에서 아낌없이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상선언>의 경우 영화 중간중간에도 여러 차례 박수가 터져나왔다. 재치 있는 대사가 정확히 안타를 치면 와하하 하고 다같이 빵 터졌다가 박수갈채, 모두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잔뜩 마음을 졸였다가 간발의 차로 위기를 넘기고 나면 숨을 내뱉으며 박수갈채, 세계인의 공감을 살 만한 촌철살인의 대사가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갈채. 이렇게 관객이 관객과, 관객이 영화와, 관객이 제작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영화를 관람한 탓에 재미와 몰입이 더 배가되는 것 같기도 했다.


  영화가 끝난 뒤 벅참과 아쉬움을 동시에 안고 건물을 나오자 영화제 구석구석 숨어있던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행을 기다리느라 오가는 사람들 속에 멀뚱히 서있던 나를 본 빨간 드레스의 여자 분은 어떻게 눈치 챘는지 사진 찍어드릴까요?(한국어) 하며 다가왔고, 칸에 살고 있다던 그녀와 그녀의 친구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한국 언론사에서 나온 취재진 분들과 인사를 나누게 됐다. 영화에 관한 인터뷰를 부탁하시길래 선뜻 응했지만 무슨 말을 하라는 지시사항이나 질문도 일절 없이 다짜고짜 카메라와 마이크에 대고 영화에 관해 프리토킹을 하려니 대책 없이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님은 며칠 후 배우 분들과의 인터뷰 때 내가 말한 내용을 전해주겠다고 하셨지만, 너무 멍청한 말만 늘어놔서 그게 과연 좋은 일인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이야기를 꼭 한번 전해드리고 싶은 마음이기는 하다.


  워낙 늦은 상영이었던 데다 러닝타임도 길고, 영화가 끝난 뒤 감독과 배우들의 소감을 한 마디씩 듣는 등의 추가 순서도 있었던 터라 밖으로 나온 시간은 상당히 늦어있었다. 일행들과 바에 들러 잠시 목을 축인 후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자 새벽 4시가 되어 있었다. 반 정도는 꿈결에 완성한 글의 발송을 마치고 잠깐 눈을 붙인 뒤 다시 이른 시간에 짐을 다 챙겨가지고 숙소를 나선 게 오늘 아침이다. 그리고 18시 50분을 막 지난 지금, 나는 칸을 떠나 다시 니스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 있다.


  지금, 충전기까지 연결한 채로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포함해 이 열차 객실의 모습을 촬영하면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될 것만 같다. 뭐, 이제 막 영화지옥에서 빠져나온 참이니 무엇인들 그렇게 보이지 않겠냐만은. 내 옆자리에 앉은 꼬마아이는 앞좌석 뒤에 붙은 테이블로 박자까지 맞춰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수준급이다. 모든 흑인이 노래를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루브와 소울이 장난이 아니다. 계속 내 맥북 화면을 쳐다보고 있는데, 사실 나 지금 니 얘기를 적고 있어 친구야. 메롱.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칸에서의 나흘이었지만, 또 막상 떠나려니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절로 느려졌다. 하지만 파리가 영 그립다. 나를 받아준 도시,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려 편안함을 주는 그 도시로 어서 돌아가고 싶다. 늘 그렇듯, 여행의 본질은 곧 돌아갈 곳이 있음이다. 시끌벅적한 영화의 도시를 떠나 작은 내 방 나 혼자만의 상영관으로, 관객이 드문 주중 낮 시간 파리의 어느 영화관으로 돌아가 나만의 영화 일상을 이어가고 싶다. 비행기에서의 끔찍한 생화학 테러를 다룬 <비상선언>의 장면들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해서 비행기 탑승을 25분 앞둔 기분이 매우 이상하지만, 어서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여행을 완성해야지.






















이전 26화 031. 칸은 바로 칸 옆에 있었다 (칸 영화제 2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