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소설 <0 영 ZERO 零>을 읽고
개쩐다.
와.. 진짜 개쩐다.
이런 매운맛 너무 오랜만이다.. 이런 비린 맛, 피맛.
그래 그간 너무 착한 소설들만 읽었다. 물론 착한 소설 너무 좋고, 그런 거 너무 중요하지만, 아아 이런 처절하고 악마적인 소설은 정말이지 너무 필요하잖아.
미친 사이코패스 주인공이 나와서 자신의 악행들을 주절주절 합리화하는 소설도, 따뜻한 연대와 사랑이 그려지는 소설도, 모두 결국은 같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작품을 다 읽고난 뒤 김사과가 살짝 무서워지려고 했는데, 뒤에 실린 인터뷰를 읽으니 결국 그도 주인공인 인간형과 반대되는 성품을 이상적으로 바라보고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터뷰어의 말처럼, 아무리 악마적인 인물들도 주인공으로서 소설의 서술을 맡아 1인칭으로 구구절절 풀어나가면, 결국은 어느 순간 동의와 공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또 어째설까. 나는 그 일이 어릴 때부터 조금 두려웠다. 누군가가 숱하게 죽고, 맞고, 강간당하는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 재밌고, 피해 인물은 물론 가해 인물에게도 깊이 이입이 되곤 하는 스스로가 조금 이상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글도 쓸 수 없었다. 내가 글을 쓰면, 내 안에 내재된 그 이상한 폭력성이라든지 악마성이 자연스럽게 그 글에 드러나게 될 테고,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걸 알아채게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책을 읽고, 또 읽고, 읽고 생각한 바에 대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한 번도. 정말 솔직한 감상은 더더욱, 절대로.
그러나 지금은 내가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보편적으로 선하고, 보편적으로 악하며, 보편적으로 이타적이고, 보편적으로 이기적이라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혹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느끼는 좋지 않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그들에게 상처를 줄 의사는 전혀 없지만, 어느 순간 느끼게 되는 특정한 감정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이라 해도 솔직하게 말하는 게 틀리거나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살리고 싶다는 생각도,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모든 인간이 바로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들임을 이젠 알고 있으니까.
소설이나 영화 속에 악역은 언제나 나오지만, 사연 없는 악역은 이젠 설득력도 없을 뿐더러, 현실세계 속의 나쁜 사람들은 더더욱 복잡미묘해서 그들로 인해 해를 입어도 뭐라 맘 편히 욕하기도 애매할 때가 많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누군가에게는 구원자요 친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천하의 원수고 악마일 것이다. 인생이 그런 거고, 소설이란 그런 인생을 닮아 있다. 우리는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
자기만의 정당성 안에 갇혀버린, 감옥같은 생의 구렁텅이 속 명료하고도 혼란한 주인공의 자아가 소름돋을 만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가엾은 우리의 악마, 사탄의 탄생은 본래 천사의 타락이다. 부족한 공감능력을 치밀함으로 전환한 명석하고 매력있는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장강명의 <표백> 속 세연이 떠올랐으나, 서술 시점의 나이 때문인지 스스로 피력하는 의도의 정당성 때문인지 돌아보면 세연 쪽은 귀여운 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세연이 훨씬 많이 죽였는데.
영화나 소설에서 연쇄살인마라든지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인물들을 보면 공포를 느끼기에 앞서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에 일종의 존경심을 갖는 편이다. 나는 오늘 밤 머리 감고 자기도 귀찮은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부지런하지, 뭐 그런 생각. 연쇄살인이고 아버지의 복수고 다 부지런해야 하는 거야, 그런 생각. 사실 현실세계의 악은, 게으름에서 기인한 자발적 무지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아무튼 어떤 종류의 성실성은 참으로 순수한 악이 되기도 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아무쪼록 이 한 권으로, 정세랑 월드에 이어 김사과 월드에 뒤늦게 입국하고 만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