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2m: 대학을 가도, 인생이 바뀌진 않더라고요

Chapter 1. 잠시만요, 제가 좀 우울해서요 2006-2013

by Luci

대학 생활은 고등학교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무릇 전국의 모든 교대 졸업자는 이 말에 절대 공감할 것임).

친구들이 다들 방학 때면 여기저기 외국으로 배낭여행을 가길래 나도 여행을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 열심히 과외 알바를 했지만

결국 못 가서 낙담하기도 했었다. 엄마가 당시 유행하던 BRICs 펀드에 투자했다가 크게 손실을 보고 나서 내가 여행 가려고 모았던 돈을 빌려달라 한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안 된다고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좀 더 착한(?) 딸이었는지 고스란히 송금해 드렸으니, 그 좋은 대학 시절에 외국 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조모임을 한다고 밤을 새우기도 하고, 레포트 쓴다고 새벽에 해 뜨는 걸 보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 노력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때면 조금(때로는 많이) 서러웠던 흔적이 일기 속에 보인다.


2007. 5. 31.

항상 반복되는 듯한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문득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조금 우습기도 하고, 조금 엉뚱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무슨 철학가라도 된 것처럼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는 것도, 심각하게 세상의 이치는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먹고 자고 즐기는 것만이 사람 사는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에, 그보다는 뭔가 더 대단한 무엇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 엉뚱한 허상에 빠지는 것 같다.
삶이 더없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하루하루가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즐겁고 모든 일이 내가 계획하고 예상했던 대로 술술 풀린다면, 삶이 무엇인지 내가 살아가는 까닭은 무엇일지 등등의 고민은 없었을지 모른다. 당장의 삶이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야 비로소 깊은 고민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일까.
내 인생은 아직 짧지만 그래서 뭐라 평가하기에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결코 찬란하거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닌 듯싶다. 누구나 현재의 삶에서 행복을 찾아가며 살아가지만 때로는 그 행복이라는 것이 나와는 너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게 되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면 뚜렷하게 어떤 목표를 세우는 것도 계획적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의지도 부족했던 나였기에, 그저 다가올 1분 1초 앞의 일도 예상치 못해서 늘 쫓기듯 불안한 마음으로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실망으로 우울했던 나였기에 지금도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피곤한 몸과 시들어버린 영혼을 어르며 허접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들을 내세울 수 있을 만큼 당당하게 밝힐 것도 없지만 (어쩌면 그래서 지금도 끊임없이 모든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돈이 없어 가난하고, 다른 사람보다 내가 열등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어째서 나는 지금의 내가 해
나가야 하는 무엇들을 좋아하지 못하고, 항상 다른 무엇을 좇기만 하는 것인지.
다가올 2주는 어쩌면 끔찍이도 괴로울지 모른다. 그 후의 생활이 그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는, 혹은 더 불행할 것이라는 예측은 없기에 나는 오늘을 내일에 대한 걱정보다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내려 하는 것 같다.


2007. 7. 20.

날씨가 계속 찌는 듯하다. 덥고 습하고 땀은 등줄기를 타고 계속 흐른다. 어느덧 여름의 절정에 다다른듯하다. 벌써 여름이라니. 방학도 반이나 지나갔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더운 여름에도 추운 겨울에도 항상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게 된다. 그들 중에는 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 어머니들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도 다 그렇겠지만 때로는 그들의 삶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만 같은, 아니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자신의 노후보다 자식의 교육을 먼저 걱정해야 하는, 가끔씩 자식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 한없이 크지만 한없이 부끄러워하는 이들. 세상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이다.
소박한 꿈을 지닌 이 세상의 많은 아버지, 어머니들의 마음에 내가 다가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요즘 들어 부쩍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의 땀방울들이 무엇보다 값진 것임을, 가슴 저리게 하는 것임을 알아가고 있다.
할 수 있다면 내가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진 짐들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다. 그들이 가는 길이 조금은 덜 힘에 부칠 수 있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 나아갈 수 있도록.


2007. 12. 20.

흘러가는 시간을 멋대로 뚝뚝 끊어 거기에 이런저런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기는 하지만, 매번 우리가 우주에서 비슷한 위치에 놓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늘 거리는 환한 조명과 시끄러운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때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구세군의 종소리로 가득 차곤하고, 그때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성큼 다가왔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곤 한다. 1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나는 무슨 모양의 궤적을 남겼을까. 풀려고 애써도 풀리지 않는 실타래 같은 모양, 지루해서 잠이라도 쏟아질 듯한 따분한 직선일 때도 있었고. 아무튼 힘겹다 느낀 적은 많았다. 불평이며 투정이 끝날 줄 몰랐다. 머릿속에선 어서 끝나게 해 달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뿐이었다.
왜 진작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 볼 겨를을 갖지 못했을까. 늘 내가 만들어 낸, 나름의 근사한 핑계 속에서 끙끙대고만 있었을까. 항상 아쉬움은 남기 마련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가 늘어갈수록 조금씩 책임도 더해지고 예전이라면 무심코 지나쳐버렸을 것들에 대한 무게가 무언가를 내리누르고 있는 듯하다. 집착도 늘어가고, 허영도 쌓여간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한 텅 빈 느낌이다. 마치 나를 내리누르던 것들이 내 안의 모든 것을 눌러 없애버리기라도 한 듯이.
거창한, 껍데기뿐인 말들이 아닌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을 쓰고 싶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생각들이 조각나고 파편으로 남아 있던 탓에 이젠 문장 하나, 단어 하나 골라 쓰는 것조차 버겁다.
예전에 썼던 글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 지금의 내 모습처럼 훗날 나도 지금의 어리석은 ‘나’의 글을 보며 예전의 ‘나’에게 핀잔을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릴케는 내가 변한다면 예전의 나도 없는 것이기에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나는 ‘나’라는 허물을 벗어버리고 싶다. 그의 말처럼 거짓이라는 때가 묻고, 가식에 오염된 낡고 닳아빠진, 축 늘어진 헌 얼굴을 벗어버리고 새 얼굴로 다시 살아가고 싶다.
이맘때면 늘 했던 다짐처럼. 다가올 새해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거란, 알 수 없는 막연한 희망처럼.


2008. 6. 29.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방학!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학생에게는 방학이 필요하다. 의무와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다니, 기쁘기 그지없다. 한 편으로는 성적을 보고 좌절할 것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것쯤이야 예상한 것들이고 전처럼 호들갑 떨고 싶지도 않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중이다.
숫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여러 가지 것들 - 내가 여태껏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 이 사실은 덜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배워가고 있다. 부정보다는 긍정이 필요하고, 걱정보다는 낙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이 역시 전적으로 균형 잡혀 있을 때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때가 있었고, 요즘은 조금씩 - 다소 의식적으로 -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사실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요소들 사이에서 마치 외줄타기 하듯이 곡예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고, 다가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 두려워하기도 하고, 작은 성공에 기뻐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늘 ‘+’ 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희망, 행복, 만족, 즐거움 같은) 머물렀던, 그런 줄로만 알았던 친구가 갑자기 인생의 ‘-’ 요소들(슬픔, 허무, 불안 같은)을 가득 담은 문자를 보내왔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가 허무하다고 했다. 왜 갑자기 그녀가 변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점은 분명해 보였다. 평소의 그녀 모습답지 않아서 낯설기는 했지만, 내가 전에 생각하고 느끼곤 했던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그 아이에게 느껴졌던 거리감이 조금은 좁혀진 것도 같고, 예전에 마음 한구석에 먼지 쌓인 헌 책처럼 정리된 감정들이 다시 들춰진 것도 같았다.
그 아이도 나도 아직은 삶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기에는 너무 어리고, 많은 경험도 갖지 못했다. 그저 - 상투적인 말이지만 온실 속 화초처럼 - 조용히 살아왔을 뿐이다. 그 아이도 언젠간 지금 느끼고 있는 극단적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올 거라 믿는다. 나에게 하지 않은 그녀만의 이야기도 계속 써 내려갈 것이다. 나 또한 계속 그랬던 것처럼, 그저 하루하루의 주어진 날들을 묵묵히 흘려보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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