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신적 요람인 이화여자중학교. 붉은 벽돌 건물도 멋지고 캠퍼스도 상당히 컸다. 공부하는 환경이 소학교와는 완전히 달라진 느낌이었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빛의 세계가 드넓게 펼쳐졌고 모든 게 흥미로웠다.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들께 배우고 체육활동도 각 종목마다 코치 선생님이 따로 있어서 왠지 프로가 되는 길로 따라가는 듯한 자부심이 한껏 일었다. 학창 시절의 선생님들은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참으로 좋은 분들이었고 선생님들을 향한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학교에 가는 매일이 기쁘고 즐겁고 신났다. 남들도 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여기저기서 들으니 나의 경험이 반드시 모두의 경험은 아니었나 보다.
이화여자중학교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아서 내가 행운아인가도 싶다. 음악 선생님은 박은영 선생님이었다. 후에 연희대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정외과의 친구 박태용이 음악 선생님의 남동생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보면 항상 볼을 꼬집으며 '똘똘아'라고 불렀다. 합창부나 음악부에 적을 두지는 못했지만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들, 음악사는 '나'를 이루는 작은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교향악단>의 지휘자이며 우리 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임원식 선생님 덕분에 서양음악을 두루 섭렵하게 되었다. 미술은 후에 천재 화가로 불리는 이인성 선생님께 배우며 화가가 될 꿈도 꿔보고, 영어 담당인 박규서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친 덕에 영어에 취미가 생겨 푹 빠졌으며 영문과를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박규서 선생님은 나중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박목월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쳤는데 후에 그리 유명한 시인이 될지 몰랐다. 졸업식 날 앨범을 들고 가서 졸업 기념으로 사인을 해달라고 청했더니 툭툭 튀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적는 글자마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읊으시며 '생명의 푸른 바다'라고 적어주었다. 불행히도 그 앨범은 전쟁통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김혁진 육상 선생님은 농구 연습을 하고 있으면 달리기와 60미터 허들을 하라고 데리러 왔고 육상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결국 나는 선생님께 이끌려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육상대회에 나가 100미터 달리기, 릴레이, 허들 경기에 참여했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수학선생님 성함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아 관심 밖에 둔 과목이라 아예 기억에 저장해 두지 않았나 보다.
이화에는 이렇게 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그중에서도 신봉조 교장 선생님은 특별한 분으로 교육 일선에서 아이들이 심신을 다질 수 있는 기반과 터전을 확실히 마련했다. 학과목 학습 외에 학생들이 각자의 능력과 호기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풍성한 활동 프로그램을 갖추느라 애썼다.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보편타당한 당신만의 철학을 철두철미하게 실천한, 존경하는 스승으로 가슴에 새겨 있다. 광복 후의 불안정하고 열악한 학교 상황 속에서도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이 미래를 향해 진취적으로 나가도록 길을 터주지 않았다면 나는 농구도 미술도, 체육활동도, 대학 진학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화여자중학교에서의 학창 시절은, 삶은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것이며 ‘나’는 만들어 가는 것임을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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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학교 상대 출신으로 이화여자중학교 농구부의 기틀을 만들며 감독 겸 코치로 활동했다. 코치는 농구는 머리로 하는 것이고 머릿속에서 코트 위의 포물선과 각도를 그리며 기하학적으로 생각하고 계산하며 코트를 뛰라고 했다. 그의 별명은 '탱크'였는데 하면 된다고 믿는 추진력이 탱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우리 팀은 이상훈 코치의 지도 아래 지방에 가서 시합을 했고 방학 때는 월미도로 합숙 훈련을 가기도 했다. 겨울이면 실내 코트가 있던 이화여자대학교 체육관, 서울고등학교, 종로 YMCA 건물에 가서 연습을 했다. 비록 허름한 코트였으나 겨울 추위를 조금이나마 피하고 운동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열기를 가로막지 못했다.
이상훈 코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 대회에 ‘KOREA’ 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참가하는 우리나라 대표 농구팀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국가대표 선수 중에는 이화여자중학교 농구 코트에 연습하러 왔던 연희대 출신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8강까지 올라간 이후 아직까지 올림픽 남자 농구 대회에서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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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오케스트라 <고려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임원식 선생님(지휘자, 피아니스트, 작곡가)은 이화여자중학교에서 음악을 담당했다. 항상 우리 이화 농구팀을 따라다니며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님과 이상훈 농구 코치는 동료 이상의 돈독한 친구 사이로 죽마고우였다.
당시에는 <명동 예술 극장>을 <시공관>이라고 불렀다. 시공관에서 임원식 선생님이 지휘하는 날에는 농구부원들을 전부 오라고 했다. 다 몰려가면 임 선생님은 턱시도를 입은 채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덕분에 음악에 귀를 열었고, 차이콥스키의 〈비창〉, 베토벤의 〈운명〉, 드보르자크의 〈유머레스크〉 등 많은 클래식 음악을 두루 섭렵했다. 자식들이 어릴 때 〈유머레스크〉 같은 소곡들을 불러주고 흥얼거리며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다.
일국의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양복을 입고는 커다란 농구공 망을 들고 경기 때마다 이 경기장 저 경기장으로 이화중학교 농구팀을 따라다녔다. 그럴 정도로 열성적인 농구 팬이었다. 학생들이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으면 젊은 선생님들도 나와서 공을 던지곤 하여 학교 운동장은 항상 활기찼고 북적거렸다. 그중에도 임원식 선생님은 빠지지 않고 나와서 농구 연습을 구경했다. 농구는 잘하지 못했으나 신사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와 골대에 공을 휙휙 넣어 보려고 했다. 한 번은 숙명 학교에서 시합이 있었는데 볼 망태기를 메고 우리와 함께 경기장으로 향했다. 아깝게도 우리는 경기에서 패했고 선생님은 속상해서 눈물까지 흘렸다.
임원식 선생님은 우리 농구팀을 위해 팀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농구부원들의 별명을 모아 지은 '룰라 룰라 룰라 룰라 룰라루 빼꼬 쌩쥐 뽕 우리들의 모임. 황소 끌고 간다' 노래를 한 목소리로 크게 부르며 떼를 지어 다녔다. '룰라 룰라 룰라'는 우리가 좋아했던 어느 영화 삽입곡 중 한 소절이다. 연습을 마치고 밥을 먹으러 갈 때도 다 먹고 나올 때도 개작을 한 노래를 입을 모아 불렀다. 운동 연습을 마치고 배고프다며 ‘배고파배 고파배 고파배~’라는 노래를 하면 선생님이 우리를 모두 이끌고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사주었다. <한일관>도 가고 이런저런 당시의 맛집에 다니며 훈련 후 시장기를 채워주었다. 다 먹고 배불러 나올 때는 ‘배불러배 불러배 불러배~’라고 노래를 불러댔다. 운동 후에 서대문 옛 고려병원 옆에 <자연장>이라는 다방에 자주 몰려갔다. 이화 농구부가 해체된 이후 선생님은 연세대 농구부로 눈을 돌렸다. . ‘정숙아' 하고 부르시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린다.
'농구광'이라고 할 만큼 농구 사랑에 둘째가면 서러운 존재였고 든든한 후원자였던 선생님은 그 젊던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열렬한 농구팬으로 농구선수는 아니었지만 '농구인'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이다. 농구 원로 임원처럼 항상 참여하며 세상을 뜨기 얼마 전까지도 코트에 나왔다.
나중에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시아재단>에 근무할 때 임원식 선생님의 해외 유학 지원을 처리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부터 맺어진 인연으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 뵈었던 선생님. 50여 년을 보고 지내니 선생님도 나도 스승과 제자라기보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선생님이 병환으로 누워 있을 때 병문안을 갔다. "나를 알아보세요?"라고 물으니 말은 못 하는데 안다는 의미로 눈을 꿈쩍거렸다. 며칠 지나 선생님은 눈을 감았다(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