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전환기 혹은 반환점에 대하여
Dear Paul,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어쩌면 그 동안 해온 일들이 전부 남의 다리 긁는 일이었는지도.
너는 늘 정답을 찾으려고 했어
남—그것이 클라이언트일지언정—이 원하는 답을 맞추기 위해, 때로는 그 남 본인도 모르는 무의식 속 정답을 찾기 위해 애쓰며 살아 온 일이었죠, 이 일이.
그러면서 어쩌면 인생을 대하는 태도도 그에 맞춰졌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그렇다고 여기는 것을 생각하는 대신, 남이 기대할 법한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몇 해 전부터 저를 찾아온 고민의 원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더 이상 일이 재미있지 않다
15년 이상을 재미있게 해 온 일인데 언젠가부터 그 재미가 안 느껴지더라고요.
겉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안에서는 뭔가가 달라지고 있었어요.
아무리 힘들고 지쳤다가도 다시 일어나게 만들던, 속에서 샘솟던 기쁨과 흥분이 사라졌어요.
그 자리를 서서히 맥빠진 관성과 매너리즘이 채워가는 게 보였어요.
지금 생각하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더 이상 남의 일을 하고 싶지 않다
남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퍼즐 맞추기 말고, 그냥 내 일을 하고 싶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해서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들이 사는 것.
그런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물론 아직은 하고 싶다는 열망보다 조심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큰 거겠죠.
시작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일을 벌이기엔 너무 늦은 거 아냐?
오십이면 이제 꺾인 나이잖아
백세시대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제 마음은 아니라고 말을 하네요.
꺾인 게 아니고 이제 막 반환점을 돈 거 아닐까.
꺾인 나이라면 내리막을 준비해야겠지만, 반환점을 돈 나이에는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진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제 겨우 절반을 왔을 뿐인데 아직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해가 하늘의 절반을 지났다고 해서 '날이 이미 꺾였으니 이제 하루를 마무리하자'는 사람은 없잖아요.
오히려 '아직 해가 중천이야!' 라며 더욱 가열차게 일하죠.
이제 겨우 오십인데,
아직 인생의 해가 중천인데.
새로운 일을 벌이기에 너무 좋은 시간 아닌가?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다소 막막한 질문 앞에 섰을 때 폴이 다시 나타났어요.
그 동안 진행해 온 한국의 여러 빅 클라이언트들, 공공기관들과의 프로젝트 얘기들을 들으면서, 뉴욕으로 떠난 이후 십여 년간 만들고 다져 온 네트워크가 드디어 토크(torque)를 발휘하는 구간에 들어섰구나, 싶었어요.
지금 저는 폴과 함께 이런 저런 점들을 이어서 선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가는 과정이 좋아요.
처음으로 비로소 무언가 내 것,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물론 아직 의욕만큼 많은 것을 빠르게 쏟아 넣고 끌어내진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 발 한 발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아직도 완전히 '내 일이다' 싶을 만큼 손에 확실히 잡히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네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계속 들고 있어라
지금 당장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 나중에 그들이 그걸 필요로 하게 될 날이 올 거다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나중이 그들이 필요로 하게 될 것.
지금 당장은 덜 중요해 보여도 결국 그것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진짜 내 일이라고 여겨지게 될 것.
그게 뭘까.
폴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일에는 그게 들어 있을까.
인생의 반환점에서
여전히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지금부터 그걸 찾아가야 할 것 같아요.
폴의 그것은 무엇인가요.
Sincerely,
Dan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