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인문학
문득 책상 서랍 구석에서 낡은 견출지 한 장을 발견했다.
빨간 테두리가 둘러진, 지금은 접착력조차 희미해진 그 작은 스티커. 어릴 적 나는 교과서에도, 공책에도, 아끼던 장난감 상자에도 꾹꾹 눌러쓴 내 이름을 붙이곤 했다. 그 행위는 단순한 분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것은 내 세계의 일부다'라고 선언하는, 꼬마였던 내가 부릴 수 있는 가장 큰 권력 행사였다.
생각해 보면, 인류는 지난 수천 년간 거대한 '견출지'를 붙이며 살아왔다. 밤하늘의 별을 이어 <별자리>라 이름 붙여 길을 찾았고, 땅의 흐름을 읽어 <도로>를 냈으며, 사람의 행동을 관찰해 <도덕>과 <관습>이라는 라벨을 붙였다. 그 모든 것이 데이터였고, 우리는 그 데이터를 분류하며 문명을 쌓아 올렸다.
그런데 2025년의 어느 날,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세상은 갑자기 '데이터가 돈이다'라고 외쳐댄다.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사실 데이터는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있었다. 단지, 그것을 돈으로 바꾸는 기술을 소수의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었을 뿐이다. 법률, 의료, 행정, 부동산... 그들만의 카르텔 안에서 데이터는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성벽이었다.
이제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그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판례가 쏟아지고, 의학 정보가 공개된다. 사람들은 환호하지만, 나는 본능적인 서늘함을 느낀다.
과연 그 기득권들이 순순히 성문을 열어줄까? 아닐 것이다.
그들은 성벽이 무너지면, 성 밖의 우물에 독을 탈지도 모른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가공된 데이터, 교묘하게 비틀린 정보들을 '진실'이라는 포장지로 감싸 세상에 뿌릴 것이다. 그리고는 점잖은 목소리로 '데이터 윤리'니 '리터러시'니 하며 대중을 가르치려 들 것이다.
여기서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분류되지 않은 것, 이름 붙지 않은 것(Unlabeled)을 마주하면 공포를 느낀다. 그것을 삼키면 마음이 체한다. 소화되지 않은 날것의 데이터는 내면에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고, 그 불편함은 곧장 타인을 향한 <공격성>이나 <혐오>로 배설된다. 생존 본능의 빨간불이 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라벨링'은 중요하다.
하지만 누가 라벨을 붙이는가? 세상이, 시스템이, 혹은 어떤 이익 집단이 내 눈앞의 현상에 '이것은 정의다', '이것은 혐오다', '이것은 트렌드다'라고 미리 붙여놓은 견출지를 나는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잘못된 라벨링은 상한 음식보다 위험하다.
상한 음식은 내 몸 하나를 아프게 하지만, 잘못된 데이터 라벨링은 내 영혼의 분별력을 마비시키고, 결국 우리 사회 전체를 엇박자로 걷게 만든다.
나는 다시 낡은 견출지를 만지작거린다. 이제 나는 결심해야 한다. 세상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남이 붙여준 이름표를 맹신하지 않기로. 내 감정이, 내 이성이, 내 경험이 납득할 때까지 씹고 뜯어보고 맛본 뒤에, 비로소 나만의 '찾아보기표'에 이름을 써서 붙이기로 한다.
라벨링은 곧 분별력이다.
그리고 그 분별력의 펜대는, 시스템이 아니라 바로 나의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끄러운 데이터의 시대에, 내가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 2025. Digitalian. (CC BY-NC-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