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진심人
혹시 ‘반드시’라는 단어에서 서늘한 강압을 느껴본 적 없으신가요? "반드시 성공해야 해", "반드시 결혼해야지", 심지어 국가가 만든 법조문에서조차 이 단어는 우리를 향해 조용히 경고합니다. '내가 정한 울타리 밖은 틀린 것이니, 토 달지 말고 따르라'고요. 오늘, 저는 이 ‘반드시’라는 말이 실은 세상에서 가장 무례한 표현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어릴 적 우리는 수많은 ‘안 돼’ 시리즈 속에서 자랍니다. “울면 안 돼”, “떠들면 안 돼”, “거짓말하면 안 돼”. 사회는 우리에게 ‘반드시’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속삭였죠.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매일 아침 뉴스에는 그 ‘안 돼’의 세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온갖 사건 사고가 넘쳐납니다. 왜일까요? 인간의 마음은 데이터와 같아서, 억지로 압축하면 반드시 오류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 하지 마라’는 말은 ‘너는 할 수 있지만,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유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우리 안의 청개구리 심보는 바로 이때 깨어납니다. 억압된 감정은 댐 아래 갇힌 물과 같아서, 가장 약한 곳을 찾아 기어코 터져 나오고야 마는 것이죠.
그렇다고 모든 ‘반드시’가 나쁜 놈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반드시’를 구분하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를 지키는 ‘가드레일’과 우리를 가두는 ‘철조망’입니다.
가드레일로서의 ‘반드시’: "음주운전은 반드시 하지 마세요." 이 말은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는 모두를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이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세워진, 우리 모두를 위한 약속입니다.
철조망으로서의 ‘반드시’: "여자는 반드시 긴 머리를 해야 해." "장남은 반드시 부모를 모셔야 한다." 이 말들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개인의 상황이나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저 한 사람이나 특정 집단의 낡은 욕망과 편견이 담긴 강압일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삶 속에서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무심코 ‘철조망’을 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반드시 ~하면 안 돼’라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 딱 1초만 멈춰봅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겁니다.
“왜? 지금 나의 상황의 조건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무의식적인 통제의 언어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반드시’라는 절대적인 명령 뒤에 숨겨진 진짜 이유, 즉 두려움, 불안, 혹은 낡은 관습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지혜로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참아야 해’ 대신 ‘지금은 힘들지만, 조금 다른 방법으로 표현해 볼까?’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반드시 그 길로 가야 해’ 대신 ‘왜 그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 다른 길의 가능성은 없을까?’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규율도 가뿐히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차가운 철조망이 아니라, 넘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뜻하고 유연한 그물망일지도 모릅니다. ‘반드시’의 세상에서 ‘어쩌면’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 데이터 속에 숨겨진 가장 위대한 지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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