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 Mar 21. 2019

개발자 공포증 극복하기

결국 일하는 태도의 문제


작년에 읽었던 수많은 글들 중 가장 재밌었던 글은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이었습니다. 스크럼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버그를 두고 생기는 기획자와 개발자의 묘한 신경전까지.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었는데, 몇몇 부분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 거려 제왕절개 수술부위가 찌릿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서비스 기획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변명하자면, 조직의 상황으로 인해 갑자기 기획업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고민을 나눌 선배도 동료도 없는 황무지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인으로서 밥값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은 생각보다 더욱 매섭고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서비스 기획은 나와 맞지 않는 옷'이라는 변명을 핑계 삼아 도피처를 찾기도 했습니다. 물론 오랜 고민 끝에 서비스 기획실로 다시 부서를 옮겼지만 말입니다. 


육아휴직 전 마지막 프로젝트는 서비스의 회원에 관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회원은 모든 서비스의 A to Z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획 측면에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실제 이용자가 보는 화면은 몇 페이지 되지 않지만, 기획을 위해 고심하고 협의해야 하는 사항은 넘쳐났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개발자와 함께 일하는 방법입니다.  



바나나우유 빨대로 맥주를 먹으면 어떡해!

저는 늘 즉흥적이고 계획을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입니다. 닭갈비가 먹고 싶다며 한 시간을 걸려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가, 갑자기 옆집의 냉면이 먹고 싶어 냉면을 먹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발자인 남편은 이런 순간이 오면 굉장히 멘붕에 빠집니다. 오늘 점심은 닭갈비라는 입력어에 오류가 나 버린 것이죠. 이런 이유로 연애부터 지금까지 근 십 년 동안 수 십 번의 부부싸움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바나나우유를 사면서 빨대를 챙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빨대를 냉장고에 있는 맥주에 턱하니 꽂아 꿀꺽 마십니다. 남편은 그 빨대가 바나나우유를 위한 빨대이기 때문에, 맥주를 마시는데 사용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나와는 참 다른 남편을 통해 개발자와의 대화법을 조금은 트레이닝할 수 있었고, 일터에서 기획자로서 일하며 아래 세 가지를 꼭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1. 흔들리지 않는 느티나무가 되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프로젝트의 목적, 취지부터 상세 일정까지 포함된 상위 기획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기획자가 작성한 상위 기획안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의 일원들이 모여 리뷰하고, 합의를 거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리고 모두가 상상하고 있는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 달려갑니다. 처음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이면 좋으련만... 여러 이유로 길을 잃거나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렇기에 기획 시점부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얻어야 하는 것', '얻기 위해 구현해야 하는 것'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한 이후에는 크고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획 사항을 디자인으로 옮겼을 때나 더 좋은 레퍼런스를 발견했을 때 다른 기획안이 생각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 미팅에선 A라고 하다가, 이번 주 미팅에서 B라고 이야기한다면 기획자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처음 기획부터 '더 이상의 수정은 없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철저하게 준비하여 기획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좋은 방향을 위해 수정이 필요하다면, 충분한 대화를 통해 변경 이유를 공유하고 납득시켜야 합니다. 


2.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기획에 앞서 서비스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등을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개발자 출신이거나, 경력 많은 백엔드 기획자는 파악하는 속도가 빠르고 이해도도 높습니다. 하지만 저는 콘텐츠 기획이나 배너 운영 등 프론트를 오랫동안 전담해왔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프론트를 이야기할 때는 자신감이 넘쳤는데, 백엔드를 이야기할 때면 늘 위축되고 기가 죽었습니다. 


'제가 잘 몰라서'라는 말은 부끄러운 단어가 아닙니다. 진짜 부끄러운 건,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회의시간에 다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생뚱맞은 기획을 하느냐 프로젝트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현명함을 배웠습니다. 회사는 전쟁터이지만,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개발자는 한 편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3. 가지치기 전문가가 되자

기존 서비스에서 개선을 진행하는 경우 프로젝트와 무관하지만, 고쳐야 하는 것들이 분수처럼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특히 PC에서 제공하는 기능을 모바일에서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작은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죠. 


모든 프로젝트에서 기획자의 가지치기는 정말 중요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고치죠! 라며 프로젝트에 개선 건을 포함하다 보면, 3주짜리 프로젝트가 3개월짜리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프로젝트에 포함해야 하는 것, 운영 개선으로 구분해서 기록해두고 추후에 해야 하는 것들을 현명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나무가 자라는데 방해가 되는 잔가지를 적절하게 잘 쳐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 애 낳기 전에 꼭 오픈해야 돼요!

기존 시스템의 한계로 인해 이슈가 생길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 '애 낳기 전에 오픈해야 돼요!'라며 개발자들을 독려(?)했었고, 출산휴가 3일을 앞두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 


출산휴가를 떠나는 마지막 날, 함께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개발자 분들이 꼭 커피 한잔 사주 시겠다며 퇴근길에 우르르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사실, 긴 시간 회사를 비우는 것이 처음이라 마음 한편이 이상했었는데 맛있는 빵집에서 일 이야기, 육아 이야기, 복직 이야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6개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따스한 퇴근길이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개발 미팅이라면 도망가고 싶어 했던 나와는 너무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동안 기획 능력을 갈고닦아 일취월장 성장한 것도 아니고, 회사 상황이 더 좋아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달라진 것은 개발자와 함께 일하는 나의 태도 하나였습니다. 모른다고 무섭다고 도망가지 않고, 함께 개발자를 믿고 의지하는 나의 태도. 더 이상 개발자는 내가 모르는 외계어를 남발하는 다른 종족의 사람이 아니라, 나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친구로 생각하니 오랜 기간 품고 있었던 기획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터에서의 두려움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려움을 직접 부딪혀 깨트리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목표는, 개발자가 함께 일하고 싶은 기획자가 되는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킨집 사장님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