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매일 같이 야근을 했다.
쏟아지는 업무와 사건 사고들은 A의 삶을 괴롭혔다. 오전 7시에 일어나 바듯이 출근을 하고, 11시에서 12시 사이에 퇴근을 하는 날이 지속되었다. 주말에도 특근을 하여 한 주에 하루를 쉬기도 쉽지 않았다. 강도 높은 노동이 생각보다 길어짐으로 인해 몸이 점점 힘들어졌다. 쉬는 날에는 하루종일 잠을 자야 그나마 한 주를 버틸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 앞에 쪽지가 적혀 있었다.
<도시가스 미검침 안내>
"꼭 전화 주세요."
A는 그날도 11시가 넘어 들어왔기에 탁자에 쪽지를 올려두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샤워 후에는 어김없이 잠이 들었고, 알람소리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하루하루가 기계 같은 삶이었다. 검침원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며칠 후 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아, 맞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였다. '내일은 연락을 해야지.'라는 생각은 쌓일 대로 쌓여버린 피로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 세 번째 쪽지가 붙어 있었고, 연락을 달라는 말 뒤에 한 문장이 더 적혀 있었다.
"너무 힘들어요."
정신을 차린 A는 주말 중에 약속을 잡아 검침을 받았다.
내가 아는 A는 평소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식당에 가면 휴지를 꺼내 숟가락을 올려두었고, 명품 가방에 음료가 튀어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A가 나에게 쪽지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였다면 틀림없이 타인을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침원의 쪽지에 적힌 말처럼 누구나 너무 힘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의 겨울, 4대 강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강에서 퍼올린 흙으로 지대가 낮은 지역의 땅을 높이는 공사현장이었다. 대체로 일이 수월한 날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들었던 일은 도랑의 흙을 퍼 올리는 일이었다. 새로 만든 수로에 흙이 흘러내려 쌓여있었는데 현장 점검 전에 그 흙을 퍼 올려야 했다. 좁은 수로의 특성상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발목까지 쌓인 흙은 물에 젖어있어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는 데 얼굴과 손에 미세한 떨림이 지속되었다. 강도 높은 노동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식구들은 평소와 같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오늘 하루의 일에 대해 물었고, 나는 약간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가 눈치를 챌 정도가 아니었는지 아버지는 평소와 같이 조언을 덧붙였다.
"아 그냥 밥 좀 먹자고~" 순간적인 짜증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 오늘 힘들게 일했는데 그만 말하고 먹어." 어머니의 빠른 중재로 더 이상의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냉랭한 분위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소에도 내가 아버지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때는 그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걸까? 너무 힘들 때에는 마음에 여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배려와 친절을 베푸는 일이 힘겨워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A가 "너무 힘들어요."라는 쪽지를 보고, 짜증을 내지 않은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전쟁과 같은 하루를 반복하면서도 타인의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니 고개가 숙여졌다.
여유가 있을 때 지옥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평가한다는 건 실로 건방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을 요구한다면 폭력일 수 있다. 삶은 그렇게 천편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A는 지옥을 살아가면서도 타인을 살피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미약하더라도 잃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힘듦을 통해 타인의 힘듦을 알아차리고 아주 작은 마음이라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빛과 같은 사람이다. 눈앞이 캄캄한 상황 중에도 작은 마음 하나를 보고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