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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12. 2024

축귀(4:31-42)

귀신을 꾸짖어라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고, 쫓아내셨다.


귀신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꾸지람을 듣고 쫓김을 당해야 하는 걸까? 성경에 나오는 귀신이 어떤 형태였는지 알 길은 없다. 현대의학이 질환으로 규정한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빙의와 같은 현상을 말하는지 상상해 볼 수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예수가 귀신을 꾸짖어 쫓아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왜 귀신을 쫓아냈을까? 예수가 축귀 사역을 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다.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했던 예수의 말과 일치한다.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건 그 사람의 상태가 부정했다는 얘기다. 즉 예수는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를 꾸짖고 쫓아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귀신만 꾸짖은 게 아니었다.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친 후 예수는 그곳을 나와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 거기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예수는 그 열병을 꾸짖었고, 여인의 병이 낫는다. 여기서 열병이 어떤 병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즉 예수는 귀신이든 질병이든 사람을 괴롭히는 실체를 꾸짖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사람들은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에게 몰려들었다. 예수는 일일이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주었는데 그때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누가는 병든 사람과 귀신 들린 사람을 딱히 구분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귀신을 꾸짖는 행위는 흔히 생각하는 퇴마 의식 같은 게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다고 이해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귀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관심 같기보다, 무엇이 생명을 죽어가게 만드는 가를 더 생각해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해와 질병, 가난한 환경, 폭력 등은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예컨대 괴롭힘을 당하는 자의 삶은 귀신 들린 자의 삶처럼 괴롭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꾸짖어야 하는가? 괴롭힘을 당하는 스스로를 꾸짖어야 하는가? 아니면 괴롭히는 자들을 꾸짖어야 할까?


회당 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소리를 지른 건 정작 괴로움에 처한 사람이었기에 자칫 예수가 귀신 들린 자를 꾸짖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귀신의 말은 귀신과 사람을 구별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사람과 상관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은 사람을 신의 형상으로 창조했다. 따라서 예수가 신의 아들인 이상 사람과 무관할 수 없다.


반면에 귀신은 스스로 예수와 상관없는 존재임을 밝힌다. 그러니 사실 사람과도 관계없는 존재가 귀신이다. 그러니까 귀신은 생명을 죽이려 들 수 있다. 관계가 없으니 무책임하고 무자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생명을 갉아먹는 자들의 말에서 유사한 태도를 발견할 때가 있다.


"네가 고통받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는 게 그들의 태도다.


문제는 이렇게 무자비한 사람도 예수와 상관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자도 신의 형상이며 괴롭히는 자도 신의 형상이라는 게 문제다. 예수는 누구를 어떻게 꾸짖어 귀신을 쫓아냈을까?


예수가 말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나왔다. 귀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넘어뜨리는 존재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상하지 않고 귀신만 내쫓을 있을까?


누가가 질병과 고통을 귀신 들린 상태로 고발하고 있는 점은 깊이 생각해 볼 지점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생명을 죽이는 건 언제나 사람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모욕하고, 정죄하며, 판단하고, 평가하는 등 사람의 말은 새로 산 커터 칼과 같은 날카로움을 가졌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과 그가 지닌 칼날을 구분 지어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 칼날을 가진 사람은 차라리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를 귀신 들린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그는 죽여야 할 존재가 아니라 살려야 할 존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여 걸어가고 있는 자를 살려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신을 단호히 꾸짖고, 쫓아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아이를 훈육할 때보다 더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단호하더라도 생명을 해치지는 말아야 한다. 귀신 들린 자를 끝까지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꾸짖더라도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쫓아내더라도 그 사람까지 쫓아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상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의 축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한 사역이다. 사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예수가 사람과 상관없는 악을 걷어버리는 작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 귀신 들리지 않은 자가 누가 있을까? 우리는 모두 귀신 들린 삶을 살고 있을 수 있다.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일어나 그들을 섬겼다."


예수가 귀신을 꾸짖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죽어가는 자를 살려, 살려내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예수의 사역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본래의 사람다움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나에게 있는 귀신이든 타인에게 있는 귀신이든 꾸짖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생명을 죽이는 삶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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