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불안(4:1-13)
증명하려 들지 않는 삶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성과에 대한 압박 느끼며 살고 있다.
한병철 교수는 자신의 책 '피로사회'에서 현대인들이 성과주체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성과를 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영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자기를 착취하는 삶. 그 가운데 개인들은 피로를 느낀다. 정신적 피로 속에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신경성 질환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왜 현대인들은 성과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성과가 필요한 근본적 원인은 생존이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 인류는 그 능력을 통해 문명을 이루고 발전시켰다. 들풀에 지나지 않았던 식물을 개량하여 곡물을 생산하고, 들짐승을 길들여 가축을 만들었다. 돌을 깎아 무기를 만들어 사냥을 했고, 성을 쌓기도 했다. 현대의 성과물들은 실로 놀랍다. 돌들을 조합하여 컴퓨터, 우주선, 자동차 등을 발명했다. 왜 이런 발명품들을 만들어냈을까? 돌이 곧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성과는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결국 돈을 만들어내야 한다. 얼마나 실용적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팔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 신발 하나를 사도 얼마나 편하고 실용적인지를 따지는 수준에서 끝나선 안된다. 소비자가 신발을 샀을 때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기업은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한다. 소비자가 특별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 성과를 내야 하는 자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성과는 곧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다. 성과급이란 이름의 급여가 있을 정도다. 왜 그렇게 돈이 필요할까? 문명을 소유하기 위함이다. 문명은 모두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소유가 허락된다. 의식주를 넘어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 등은 필수품에 가깝다. 그러나 필수품인 동시에 기호품이다. 상품에는 서열이 있으며 상품의 서열은 곧 나의 서열을 나타내기도 한다.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명품시계를 찬 채 고급세단에서 내리는 중년 남성의 온화한 미소를 생각해 보라.
문명을 소유하는 사람. 그는 성과를 내는 사람이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문명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걸까? 반 친구들 모두가 아이폰을 사용할 때 나 혼자 폴더 폰을 사용하고 있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는가. 문명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박탈감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장 강력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소외감일 것이다. 아이폰을 가진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하거나, 같이 게임을 하지 못할 때 개인은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이폰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근본적으로 아이가 원하는 건 아이폰이 아니다. 존재의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것.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아이폰은 필요치 않다. 내 아이만 고가의 학원에 다니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 깊은 내면에는 내 아이가 성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자리를 잡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성과를 내는 작업은 존재를 증명하는 작업일 수 있다.
"나도 아이폰이 있다.", "나도 아파트에 살고 있다.", "나도 문명을 소유하고 있다."라는 외침은 결국 "나도 여기에 있다."라는 절규일지 모른다.
예수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존재를 증명해 보라는 시험이다. 마귀는 말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해 보아라." 성과를 내보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무엇인가? "천하 만국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문명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소리다.
그러나 성과를 내어도 문명을 소유하여도 존재는 불안하다. 성과주체가 성과를 내고, 소비주체가 끊임없이 소비하여도 왜 불안한 것일까?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다. 존재는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예수는 얼마든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었다. 천하만국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시험을 거부했을까?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는 것과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성과를 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문명을 소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성과와 소유를 통해 존재의 불안을 이겨내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지치는 때가 온다. 애초부터 잘못된 방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성과를 내어야만 인정받고, 소유를 해야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마귀의 속삭임이다. 결국 생명이 고갈되어 간다. 생명을 무너뜨리는 일이 마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결국 마지막 시험을 당하게 된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게 될 수 있다. 다 던져버리고, 포기해 버리고 싶을 수 있다. 마귀의 마지막 유혹이다.
현대사회의 성과주체와 소비주체들이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존재는 증명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태초에 부여된 것이지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지위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신의 자녀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성과를 내야 하는 건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다. 소비를 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단순한 일에 너무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수준의 돈이면 족하다. 적당히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넘치면 나누고, 부족하면 도움을 좀 받아도 괜찮다.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나누기 위해 노력하자. 다만 존재의 불안을 느끼며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건 존재의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다. 시험을 이겨내라. 문명의 복잡함 속에서 잠깐 벗어나 광야로 나가보자. 그곳에서 나의 존재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