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백성이 세례를 받을 때 예수도 세례를 받았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자는 누구일까? 전통적으로 예수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예수가 세례를 받기 전 요한이 옥에 갇히는 사건이 기록된다. 즉 문맥의 흐름상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요한을 배제시켰을까?
한 가지 궁금증을 더해보자면 예수가 왜 세례를 받았는지이다. 누가는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회개하여 더 이상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게 요한의 메시지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전통적으로 예수는 흠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거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에게는 죄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면 예수는 왜 회개의 세례를 받았는가? 회개라 함은 죄를 전제하는 행위가 아닌가?
누가는 예수의 세례 사건을 아주 짧게 요약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였다는 게 전부다.
이어서 예수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누가는 그 활동의 내용을 전하기 앞서 예수의 족보를 나열한다. 누가의 족보가 정확한 지는 알 수 없으나 눈여겨볼 만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는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을 언급하고 아담 위에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가는 왜 예수의 세례 이후 족보를 언급했던 걸까?
세례와 족보 사이에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세례에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이 사실을 언급하고, 족보에서는 인간의 역사를 언급하며 결국 모든 사람이 신의 자녀임을 밝힌다. 즉 누가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왜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 중요했을까? 모든 삶은 그저 주어진다. 누구도 시작을 선택할 수는 없다.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폭력적인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냥 그렇게 시작이 된다. 문제는 현실 세계가 평탄하지 않으며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이다.
왜곡된 환경은 왜곡된 정체성을 낳는다. 신분제도는 서열에 따라 정체성을 부여하고, 가부장제도는 성별에 따라 정체성을 부여했다. 이러한 제도 속에는 권력이 숨어 있다. 권력자가 비권력자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식으로 구조가 흘러간다. 아버지가 딸에게 "여자가 대학은 무슨 대학을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권력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이다.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가부장제도도 많이 무너져가고 있지만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돈, 학벌, 직업 등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며 정체성이 부여된다. 정체성이 부여된다는 건 꼭 "너는 3등 신분이야"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 있다.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지 않아도 "나는 못해.", "나는 바보야."라는 말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교묘한 괴롬힘이 문화로 자리 잡은 집단에서 직접적이지 않은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개인의 정체성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왜곡된 정체성을 바로잡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죄를 회개하는 게 우선인가? 그렇지 않다.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괴롭히는 자나 괴롭힘을 당하는 자나 왜곡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먼저 깨달아야 한다. 신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성을 먼저 부여해야 회개할 수 있다.
스스로를 한심하고 무능하게 생각했던 피해자가 자신이 본래 신의 자녀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죄를 고백할 수 있다. 회개는 피해자를 더 괴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정체성 속에 고통받는 자를 구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괴롭히며 오만의 정체성에 사로잡혔던 자도 본연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 회개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이 신의 자녀로서의 삶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삶이었는지를 깨달았을 때 그는 참된 회개로 나아갈 수 있다.
누가가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요한을 배제시켰던 건 가장 중요한 걸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 예수의 정체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며 모든 사람의 정체성도 올라가 보면 하나님에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한 듯하다.
신에게서 부여된 정체성. 인간의 존엄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스스로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타인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아보는 일.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