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4:14-30)
갈 길 갈 수 있는 용기
광야의 시험이 끝나고 예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령 충만함을 입은 예수가 갈릴리로 돌아왔다. 그는 지역의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으며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어떤 이야기를 했기에 사람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좋아했을까? 누가는 나사렛의 회당으로 독자들을 데려가 이사야의 말씀을 들려준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변방 지역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또,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방인과의 혼인이 잦았고, 언어도 많이 섞여 있어 지방 사투리도 있었다. 혈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이런 갈릴리 사람들을 같은 유대인으로 보기보다 얕잡아보는 경향이 강했다. 갈릴리 사람들은 가난했고 억눌렸으며, 포로 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은혜의 해를 선포했다. '예언이 갈릴리에도 이루어질까'하는 의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은혜의 소식을 전파했다. 억눌린 마음은 위로를 받았고,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그 소식을 전했다.
예수가 자란 동네 나사렛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다만 다른 지역과는 다른 반응 하나가 나타난다. 어떤 반응이었을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반응이었다. 같은 사건을 다루는 다른 복음서를 살펴보면 마태복음의 경우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또 마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어떤 반응이든 이런 유의 대답은 사람을 낮춰보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탁월함과 목수의 아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더 충격적인 건 어머니 마리아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가부장제가 확고했던 시절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예수가 사생아였다는 사실이 아직도 언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반응을 보인 후 그들은 예수를 배척한다.
그들의 반응을 본 예수가 말한다. "너희는 나에게 '의사야, 네 병이 나 고쳐라.' 하는 속담과 같이 나에게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일들을 여기서도 한번 해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마음이 움직였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예수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사렛 사람들. 예수는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놀라운 건 나사렛 사람들이 평소 편견과 차별로 인해 억눌리고 괴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표현은 당시 나사렛을 비롯한 갈릴리 지역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보편적이었음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가난한 환경, 차별과 편견을 이겨내고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는 청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성장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어, 근데 요셉의 아들이잖아."
"목수 아들이잖아."
"마리아 아들이잖아."
"사생아잖아."
차별의 피해자들은 예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옹졸함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편견과 차별이 시작된 이유는 바로 이 옹졸함 때문일 수 있다. 처음부터 신분제도가 있고, 인종차별과 지역 차별이 있지는 않았을 거다. 시작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부터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옹졸함, 한 가정 안에서 서로를 시기하고, 한 무리 안에서 서로를 얕잡아 보는 일.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마음, 누군가의 성공에 박수를 보내기보다 흠집을 내려 드는 그 옹졸함이 편견과 차별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옹졸한 나사렛 사람들에게 예수가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과부가 많았지만,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한 과부만이 엘리야를 보살폈고, 엘리사 때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치료를 받은 사람은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
편견에 사로잡힌 옹졸한 마음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그 옹졸함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성령 충만한 예수도 그 옹졸함 앞에서는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노하여 예수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간다. 옹졸함을 들키자 도리어 역정을 내고 난리를 치며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자신의 볼품없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늘 이렇게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며 살아간다.
놀랍게도 예수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갔다. 유유히 자기의 갈 길을 갔다. 편견과 차별의 소리를 지나, 그들의 성난 아우성을 지나, 갈 길을 간다. 예수에게는 가고자 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을 얕잡아보는 행위는 죄악이다. 사람은 모두 신의 자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편견에 사로잡힌 마음, 근거 없이 남을 비방하는 말들은 모두 헛소리들이다. 누군가 당신을 깎아내리려 애를 쓴다면 그 사람은 헛된 일에 애를 쓰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다.
일일이 헛소리에 반응하며 살지 말자. 그들은 성을 내고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가자. 나의 옹졸함을 인정하고, 훌훌 털어버린 채 자유롭게 가자.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움츠러들지 말고, 크게 신경 쓰지도 말고 우직하게 가자.
은혜의 해. 억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고, 가난한 자가 부요한 마음을 얻으며, 포로 된 자유가 해방되는 그 나라를 향해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신께서 당신의 길에 함께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