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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09. 2024

예수의 자유(6:1-11)

주체적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주체적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감정과 이성. 두 가지를 통해 알아차릴 수가 있겠다. 


먼저 감정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한 건물 안에 갇혀 한 달을 넘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감정은 어떨까? 답답하고 괴로울 테다. 그런데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상상해 보라. 해방감과 성취감 또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한다. 어느 누가 억눌리고 답답한 마음으로 살고 싶겠는가? 그러니 주체적 삶은 구원이다. 생명이 살아나는 일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되는 과정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감정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누군가 "해방감을 가져.", "자신감을 가져."라고 말해주면 가져지는 것일까? 오히려 있던 감정도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니 주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경험을 통해야만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다. 자신감이 없고 의지가 없던 사람도 작은 것에서부터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다 보면, 조금씩 자신감도 생기고 해방감도 누릴 수 있게 된다. 반면에 주체적 삶에 제약을 걸면 어떨까? "네가 뭘 안다고 나서냐.",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와 같은 말들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어느새 좋은 감정이 사라지게 된다. 다시 억눌리고 답답한 마음이 자라나게 되는 거다.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병들 수밖에 없다. 주체성이 실현되지 못하면 생명이 죽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니 주체적 삶은 선택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체적 삶을 살아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어떻게는 해방감과 성취감 같은 감정들을 느끼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예를 들어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엄마를 거스를 수 없다면 게임 대신 공부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로 타협안이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공부를 하는 대신  시간 게임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든지, 용돈을 올려주거나 고가의 공산품을 선물 받는 일 등이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를 꺾는 대신 다른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를 통해 아이는 기쁨을 회복해 보려고 한다. 잃어버린 자유로움의 대체재를 찾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자유를 누리는 삶은 과연 주체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황이 허락하는 의지만 발현시키고, 그렇지 않은 건 포기해 버린다면 주체적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체적 삶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성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적 사고를 통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 달 동안 건물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더 오랜 시간을 갇혀있다고 생각해 보자.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는 생활이 지속된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제발 먹기만 해도 좋겠다.', '씻기만 해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테다. 이런 상황에서 음식과 물이 허용된다면 사람들은 분명 자유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준다면 성취감을 느끼기도 좋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주체적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걸 스스로 알아야 한다. 즉 자신의 의지는 더 큰 자유를 원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다.


안식일에 예수와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는 일이 발생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겁니까?


유대 사회에는 안식일에 추수를 해선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들은 제자들이 추수를 했다고 여겨 그들을 비난한 것이었다.


예수는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행위가 추수가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는 거다. 대신 예수는 다윗의 이야기를 꺼낸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그 일행과 함께 제단에 드려진 음식을 먹은 일을 상기시켰다. 제단에 드려진 음식은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었지만 배고픈 다윗과 일행은 그 음식을 먹었었다는 얘기다. 즉 예수는 제자들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일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다른 안식일 날에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다. 예수가 회당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왔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다는 걸 빌미로 예수를 고발할 심산이었다.


예수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손이 불편한 사람을 가운데로 불러 세웠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는 불편한 을 치유해 주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에 대한 분노를 더 키우게 되었다.


예수는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왜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자기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걸까?


어떤 법도 생명보다 중요한 법은 없다. 왜냐하면 법은 곧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위한 일이라면 의지를 꺾을 필요가 없다. 물론 모든 의지를 꺾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의지를 꺾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의지를 발현시키는 일이 반드시 생명을 살리는 건 결코 아니다. 감정에 치우치면 언제든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진실로 나를 살리는 감정인지를 살펴야 한다.


예수가 안식일 법을 더 우선에 두고 제자들의 행동을 꾸짖었다면 어땠을까?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는 데 이용당하는 손 마른 사람을 외면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예수가 십자가를 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이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다. 법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 주체적 삶은 생명의 가치를 깨닫는 자에게 내려지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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