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살아나는 쪽으로 걷기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이때'가 언제기에 밤새도록 기도를 했을까?
안식일에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의 충돌이 일어난 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에 대한 적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가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때부터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지를 논의했다.
그들은 왜 예수를 적으로 규정했을까? 예수가 틀린 말을 했나? 실수를 했나? 옳지 못한 행동을 했나? 그렇지 않다. 그저 그들의 심기가 불편했을 뿐이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을 경험할 때가 있다. 질투와 시기, 화풀이, 자격지심, 옹졸함과 교만 등의 희생양이 되는 거다. 이런 유는 회사, 학교, 교회, 심지어 가정 안에서도 발견되는 것들이다. 즉 어디에서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장을 관두고, 자퇴를 하고, 교회도 떠나고, 집을 나가버리면 그만일까? 필요한 방법의 하나겠지만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수는 없을 테다. 결국 부당함을 겪으면서도 꾸역꾸역 살아가야 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때가 바로 이런 때이지 싶다. 잘못도 없이 모함을 당하여 괴로움이 사무칠 때, 지친 몸을 이끌고 밤새워 기도 하는 게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울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기도 한다.
그러나 기도가 끝나면 어떤가? 결국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 지옥 같은 일상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상황은 바뀌지는 않는다. 여전히 옹졸하고, 사악하며, 집요하다. 바뀌는 것도 없는데 기도는 해서 무얼 할까?
기도를 마친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다. 그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고 칭하였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 곧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자이다. 예수는 함께할 동역자들을 데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일상으로 돌아와 예수가 한 일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다만 보다 본격적으로 생명을 살리기 시작했다. 유대 온 사방과 예루살렘,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 땅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았다. 가난하고, 억눌리며, 모함을 받고, 괴로운 자들이 몰려와 구원을 얻는다. 몸이 다시 건강해지고, 사회적 건강을 되찾으며, 영적 건강을 회복한다.
만약 예수가 생명을 살리는 일을 더 본격적으로 하기보다 바리새인들에게 맞서는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왜곡된 자아로 인한 인신공격들은 이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 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옳은 말을 해봐야 발뺌할 뿐이다. 혹은 뻔뻔해지거나. 이런 자들과 대화를 한다는 건 큰 벽을 마주하는 일과 같다. 아무리 변론하고 소리쳐봐야 나만 지쳐갈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죽는 길이 아닌 사는 길을 택하여 가야 한다. 누군가 나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려 든다면 이전보다 더욱 생명이 살아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해방감, 보람, 성취감 등 기쁨이 회복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제자를 세우고 그들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보람된 일이 또 있을까? 억눌리고, 병들고, 고난을 받는 자들이 몰려와 치유를 받고, 삶의 회복하는 일보다 행복한 일이 있을까?
물론 누구나 제자를 세우고 싶어 하고, 타인의 삶을 돌보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생명이 살아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잠깐의 쾌락으로 고통을 잊는 식의 방식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생명이 살아나는 일을 해야 한다.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걸 배워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멈추지 말고 또 찾아야 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렇게 생명이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을 고갈시키지 않고, 의무와 책임에 얽매이지 않으며, 작은 기호라도 선택할 수 있는 삶.
그 길은 곧 창조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