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세상이 한 번 뒤집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세상은 잘못됐다. 마르크스가 역사를 권력투쟁의 이야기로 말하지 않았어도 나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자로 나뉘는 세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역사를 권력투쟁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이 서열화되어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테다. 학교, 회사, 심지어 교회까지도 권력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서열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권력구조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한 번 자리 잡힌 구조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왕이 권력을 세습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권력을 세습한다. 할아버지의 재력이 아이의 실력을 좌우한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권력을 사랑하고, 한 번 잡은 권력은 쉽게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건 과거나 현재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세상이 한 번 뒤집힌다면 어떠할까? 누구나 다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세상을 꿈꿔볼 수 있을 것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은 뒤집힌 세상이어야 치고 올라가 볼 수 있다는 슬픈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절도 다르지 않았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의 권력에 대항할 자가 아무도 없던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유대 사회의 종교 권력도 다르지 않았다. 로마는 세상을 좌지우지하려 들었고, 이스라엘의 종교 권력은 사회를 통제하려고 들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도 세상이 뒤집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까? 황제의 장자에게 밀린 둘째 아들이 세상을 뒤집고 싶은 마음을 품을 수는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기득권으로 보여도 당사자는 앙심을 품을 수 있다. 피지배층의 삶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영화 '컬러 퍼플'에서 보여주듯 흑인들이 함께 억압받았지만, 그 세계 안에도 억압과 지배는 존재했다.
그러니 결국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세상에 대한 불만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앙심이 투쟁심을 일으킨다.
오늘 묵상해 볼 본문은 예수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택한 후 그는 잔치를 열었다. 세리는 백성을 억압하는 로마와 헤롯을 대신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꼭 종교 권력이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백성들은 그들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었다.
그러니 레위의 친구들이 누구였겠는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었을 테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 그들이 레위의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셨다. 그런 예수의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했다.
"너희가 어찌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들은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 권력,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들이었다. 그 질서는 무엇이었을까? '누가 더 신의 자녀다운가.'에 관한 질서였다. 그들은 신의 자녀다움에 서열을 부여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이고, 구별은 곧 '거룩'을 일컫는 말이다. 즉, 얼마나 구별된 삶인 가에 따라 서열을 매겼다. 가령 술을 마시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면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 더 거룩한 사람이 되는 식이었다.
금식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는 행위가 구별된 행위, 곧 거룩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이 예수에게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가?"
그들이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결국, "당신은 거룩한 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듯하다. 예수는 거룩하지 않은 자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셨고, 거룩의 상징인 경건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왜 예수는 그들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었을까? 예수에게는 세리의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거룩하지 않은 행위가 아니었다. 예수가 생각하는 거룩과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거룩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예수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예수가 말한 새 술과 새 부대는 무엇일까?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권력에 대한 투쟁을 각오해야 한다. 이미 굳어진 질서를 바꿀 때는 기득권의 저항이 따르기 마련이다. 예수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화평을 주려 온 줄 아느냐? 도리어 분쟁케 하려고 왔다."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투쟁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즉, 투쟁을 통해 세상을 뒤집으면 결국 또 다른 권력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려고 든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예수의 삶은 달랐다. 예수는 권력을 쥐기 위해 권력과 부딪힌 게 아니었다. 예수는 권력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갔다. 예수는 왜 권력을 잡지도 않을 거면서 투쟁했던 것일까?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가 기꺼이 투쟁의 길을 걸었던 이유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왜곡된 세상에 대한 앙심을 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예수는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며, 가난한 자를 일으키기 위해 분쟁을 일으켰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예수의 동력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분노와 앙심이 따라오는 경우가 많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 대한 분노는 자연스러운 수순일 수 있다. 그런데 분노에 찬 자들이 세상을 뒤집고 권력에 눈을 뜨는 일들을 본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고자 일어났던 사람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민주주의 수호하려는 자들이 기득권이 되어 밥그릇 지키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 투쟁의 덧없음을 느끼곤 한다.
예수의 부르심에 레위가 답한다. 권력을 대신해 세금을 거둬가던 착실한 세리가 자리를 박차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예수는 기꺼이 레위를 안아준다. 예수의 제자 중에는 세리도 있고, 어부도 있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한 데 어울려 먹고 마시는 세상. 예수가 꿈꾼 세상은 사랑이 이기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