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치유(5:12-26)
공간을 내어주는 환대
같은 병에 걸렸다고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달리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을 때 어떤 사람은 무릎을 툴툴 털고 일어나는 반면, 어떤 이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수 있다. 왜 이런 차이가 벌어질까? 정신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신체적인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개인 차만이 고통의 크기를 다르게 만드는 요인일까?
주변의 반응에 따라서도 고통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넘어진 사람에게 "아오, 뭐 하냐? 누가 xx 아니랄까 봐."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이후 주변 사람들의 키득거리는 조롱 소리가 들려온다면 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본문에 등장하는 두 명의 병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로 인한 고통을 함께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나병은 나균으로 인해 피부나 신경조직이 변형되는 질병이다. 지금은 한센병으로 불리는 질병인데 6세기에 처음 발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이 한센병이었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특히나 당시에는 의사가 진단을 내리지 않고,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이 진단을 내렸기 때문에 본문의 나병환자가 한센병 환자였는지 더욱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왜 의사도 아닌 제사장이 질병의 진단을 내렸던 것일까? 아마도 피부병은 전염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빠른 격리 조치가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면 격리 조치를 당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마을 밖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회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생산과 판매, 교육 등 구성원들은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마을에서 쫓겨난다는 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삶이 무너진다는 걸 의미했다. 입고, 먹고, 자는 기본적 생활이 무너지고, 사람을 피해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눈에 띄지 말아야 할 존재가 돼버렸다.
그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질병이 주는 고통이었을까? 사회적 고통이었을까? 예수가 그에게 제사장을 찾아가 몸을 보이라고 했던 건 그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회복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중풍 병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의 사회적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그를 침상 채 들고 예수를 찾아왔다. 하지만 어땠는가?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그다지 신경 써야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불쌍한 사람도 아니었다.
유대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회였다.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사회적 약자인 중풍 병자를 배려하지 않았을까? 말씀을 무시하는 걸 어렵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 자리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즉 율법 전문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러면 무엇일까? 사람들에게는 중풍 병자를 무시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중풍 병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의 질병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여 '죄인'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그러니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죄인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사람을 냉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걷어내고, 예수님 앞에 그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던 사람이 정 중앙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예수는 말한다.
"이 사람아. 자네의 죄는 용서를 받았네"
예수의 죄 사함의 선포는 그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걷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를 사회적 고통으로부터 구해내는 선포였다.
그 순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가?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왜 죄 사함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들이 바로 프레임을 씌운 주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질병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린다. 하지만 질병에 걸렸다고, 장애가 있다고 사회 구성원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구성원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예수의 뜻이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가난, 질병, 사건 사고 등에 '죄인'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그들을 밀어내고 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바라기만 하는 사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등으로 찍히게 되면 여간해선 회복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빼앗아버린다.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권리를 찾고,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던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프레임을 걷어내고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풍 병자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친구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먼저 친구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인자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사람에게도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한 사람이 가진 옹졸함, 이기심, 나약함 등에도 불구하고 그를 소중한 존재로 대하는 사람은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이 친구를 구했다.
사람을 죄인 취급하지 않고, 같은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믿음. 사람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고, 존귀한 신의 자녀로 대우하는 믿음. 이 믿음이야말로 사회적 고통을 치유하는 환대를 낳을 수 있다.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는 환대가 사회적 치유를 일으킬 수 있기를. 적어도 사람들이 구성원 자리에서 밀려날 것 같은 불안은 느끼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