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품고 사는 사람
어떤 사람들이 예수에게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순례 온 갈릴리 사람 몇을 학살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그런 일을 겪었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는 한 가지 사례를 덧붙인다. 실로암이라는 못 근처에서 망대 쌓는 공사를 하다가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예수는 그들 역시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했다. 또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대화의 정황으로 볼 때 당시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일어난 불행이 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즉 큰 불행을 겪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던 거다.
이러한 생각은 인과응보 사상을 나타낸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인과응보에 기반한 성경 해석을 가르치고 있었다. 신명기 사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심판은 곧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한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불행을 당하는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하나님 앞에선 다 같은 죄인이라고 말한다. 즉 불행을 겪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을 겪은 인간보다 더 나은 인간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예수의 주장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보편적인 죄를 말할 때는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불행을 겪는 누군가와 다른 사람들을 싸잡아서 죄인이라고 할 때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이기적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 사람이나 너나 같은 죄인이라는 말은 타인과 나를 비교하게 만든다. 그러면 예수는 왜 불행을 겪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예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열매 맺는 나무가 열매 맺지 못함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회개는 단순히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걸 넘어서는 문제였다. 회개의 본질은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맡겨진 업무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해 보자. 불성실한 업무 태도와 반복된 실수가 연속된다면 회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는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 따라 태어났다면 어떨까? 사람은 창조주의 뜻을 따라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이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는 것.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돌봄으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러면 사명을 다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되는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포도원 지기는 말했다. "올해에도 그대로 두십시오. 제가 거름을 주고 잘 가꾸어 보겠습니다."
예수가 이 비유에 대해 말한 후 사건이 일어난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등 굽은 여인을 치유해 주었다. 18년을 귀신 들려 앓고, 허리가 굽어 펴지 못해 고통받던 여인의 허리가 펴졌다. 그러나 이 감격스러운 순간에 회당장은 분노한다. 그들의 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치료행위를 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풀도 먹이고 물도 먹이는데 18년 동안 고통받은 여인을 살려주는 게 안식일에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까?"
당시 유대 사회는 가부장 제도가 엄격히 자리 잡은 사회였다. 회당예배는 남성들이 주도하였고, 여성들은 뒷전이었다. 유대 여성들은 기를 펴고 살 수 없었다. 따라서 허리 굽은 여성의 처지는 당시 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던 여성들의 현실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여성의 굽은 허리를 펴 준 것인가?
예수는 굽은 등을 펴고 당당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마땅히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즉 당당하지 못하고, 위축되고, 고개 숙인 삶은 창조주의 의도와는 다른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당당하지 못하게 하고 위축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의 불행을 그 사람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시도는 사람을 위축시키는 일이다.
창조주의 의도는 불완전한 인간이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람은 별도로 존재할 수 없고, 연결되어 살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불행 또한 한 사람의 불행일 수 없고, 한 사람의 탓일 수도 없다. 신명기 사관에 나타난 인과응보 사상은 민족의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을 강조한다.
한 사람의 잘못, 한 지파의 잘못은 그들만의 잘못일 수 없고, 한 사람의 행운, 한 지파의 행운도 그들만의 행운일 수 없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들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과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의 불행 원인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을 테다.
창조주의 의도를 아는 사람은 한 사건을 통해 인류의 죄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길은 무엇일까?
창조주의 뜻을 발견한 사람들의 회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겨자씨이자 누룩이다. 등 굽은 여성의 처지를 바라보며 시대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그 시대의 아픔 속에 회개하고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고자 결단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품고 사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