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물이 아닌, 전리품으로서 마라톤 굿즈
얼마 전 대구마라톤이 역대 최대 규모로 성황리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왔고 러닝 시즌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3월 15일, 국내 최대 규모의 마라톤인 서울마라톤(구 동아마라톤)을 앞두고 있고, 그 전후로 크고 작은 러닝 대회들이 연이어 열립니다. 주말마다 도심 곳곳이 통제되고, 러너들은 다시 배번을 달 준비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러닝 10년차나 되는... 제법 오래 달려온 고인물 러너입니다. 국내외 여러 마라톤 대회를 뛰었고, 그 시간만큼 집 한켠에는 메달과 각종 대회 굿즈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걸 계속 두어야 할까.'
그만큼 쓰이지 않는 아이템이 많다는 뜻입니다. 어떤 대회 티셔츠는 러닝할 때 자연스럽게 손이 갑니다. 어떤 굿즈는 일상에서도 종종 사용하곤 합니다. 반면 어떤 굿즈는 참가 키트를 열어본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사라지곤 합니다. 같은 거리를 달리고 받은 물건인데도 왜 어떤 것은 쓰이고, 어떤 것은 사라질까요.
아마 그 차이는, 그 물건이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주 후에 남는 것은 기록만이 아닐 겁니다. 그 날의 온도, 코스의 풍경, 마지막 피니쉬를 앞둔 감각 그리고 그 시간을 붙잡아 두는 물건들입니다.
참가 키트를 받는 순간, 우리는 그 대회를 처음으로 ‘만집니다’. 티셔츠의 소재와 핏, 그래픽, 로고의 배치 같은 작은 요소들이 대회에 대한 첫 인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 뒤, 그 굿즈는 기억을 자시 불러옵니다.
그래서 저는 마라톤 굿즈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됩니다.
국내 메이저 대회가 만든 '기본값'
서울마라톤과 JTBC 마라톤은 국내를 대표하는 메이저 대회입니다. 두 대회의 굿즈는 구성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합니다. 협찬 브랜드의 기능성 티셔츠, 배번, 에너지젤, 메달(완주 후 지급). 안정적이고 익숙한 구성입니다.
이 구성은 일종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많은 대회들이 이 틀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참가자는 일정 수준 이상의 구성을 기대할 수 있고, 운영 측면에서도 검증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표준이 있다는 건 분명 장점입니다. 다만 그 위에 무엇을 얹을 것인가는 각 대회의 선택입니다. 그 작은 차이가 굿즈를 '단순 기념품' 혹은 '협찬사 홍보 판촉물'로 남길지 오래 기억될 아이템으로 남길지를 가릅니다.
IP 브랜드가 보여준 또 다른 방향
국내 메이저 대회가 '기본 구성'을 안정적으로 다듬어왔다면, IP 기반 러닝 이벤트는 굿즈 설계 자체를 다르게 가져갑니다.
작년 5월과 8월,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열린 '무한도전 RUN'은 전통적인 러닝 대회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기록 경쟁보다는 IP의 세계관과 팬 경험이 중심이었고, 굿즈 역시 러닝 퍼포먼스보다는 브랜드 경험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방송 속 세계관과 연결된 아이템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국내에서는 작년 처음 열린 디즈니 런을 들 수 있습니다. 원조는 1994년, 미국 플로리다 월트 디즈니 리조트에서 시작된 대회로 5K, 10K, 하프, 풀코스까지 다양한 종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메달입니다. 디즈니 팬들의 수집욕을 자극하는 요소로 설계되어 있는데, 입체 조형이나 열리는 구조, 캐릭터별 디자인처럼 일반적인 완주 메달과는 결이 다릅니다. 이 메달은 단순한 완주 증표를 넘어, 대회 기념품이자 컬렉터 굿즈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맥락입니다. IP가 분명하면 굿즈의 방향도 선명해집니다. 대회명만 인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을 입힙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템은 단순 참가 기념품으로만 소비되지 않습니다. 참가자들은 그것을 기록의 증표 뿐만 아니라, 대회를 두고두고 기억하는 아이템으로 소유합니다. 단순 홍보물이 아니라, 기록을 남기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세계관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활용됩니다.
해리티지가 만든 무게
IP가 굿즈에 세계관을 입힌다면 해리티지는 굿즈에 자격을 부여합니다.
세계 6대 마라톤 중 하나인 베를린 마라톤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베를린은 ‘기록의 도시’라는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계 기록이 탄생한 코스, 평탄한 루트, 빠름을 상징하는 대회. 이 정체성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러너들에게 하나의 목표가 됩니다. 그래서 베를린의 굿즈는 대회 기념품에 머물지 않습니다.
도시의 랜드마크를 구성한 그래픽, 상징인 곰(Berliner Bär)을 활용한 디자인, ‘Berlin Finisher’라는 문구. 이 요소들은 대회명을 인쇄한 장식이 아니라, “나는 그 코스를 통과했다”는 증표처럼 작동합니다.
베를린 마라톤의 공식 스폰서는 아디다스입니다. 매년 별도의 컬렉션을 선보이고, 피니셔 자켓은 일종의 배지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공식 파트너가 아니어도,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들은 베를린 시즌에 맞춰 라인을 선보입니다. 나이키를 비롯한 여러 브랜드가 도시와 마라톤을 테마로 한 아이템을 출시합니다. 트랙스미스나 UVU 같은 로컬 브랜드 역시 이 흐름에 동참하여 대회를 기념하는 의류와 액세서리를 구성합니다.
왜일까요.
대회가 단순 이벤트가 아니라, 러너들이 ‘획득하고 싶은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전리품은 누군가에게 나눠주는 물건이 아닙니다. 자격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 상징입니다. 베를린 마라톤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굿즈는 일종의 자격증이 됩니다. IP가 굿즈를 이야기로 확장시킨다면, 해리티지는 굿즈를 전리품으로 격상시킵니다.
완주 후에 남는 것
모든 굿즈가 오래 남는 것은 아닙니다.
협찬 제품을 모아 담은 키트, 러닝과 크게 상관없는 의류, 기본 아이템에 대회명만 얹은 구성. 그런 물건들은 ‘받았다’는 기억만 남기고 금세 서랍 속으로 들어갑니다.
반대로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아이템도 있습니다. 자주 사용하게 되고, 가끔 꺼내 보며 그날의 공기와 코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물건들이 그렇습니다.
마라톤은 몇 시간의 레이스지만, 그 앞에는 몇 달 이상의 준비가 있습니다. 켜켜이 쌓은 마일리지와 훈련,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지나 도착한 출발선입니다.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에게 건네는 물건이라면, 굿즈 역시 그만큼의 무게를 함께 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DiiVER는 굿즈 기획을 할 때, 눈에 각인되는 브랜딩과 함께 그 경험이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는 방식을 함께 고민합니다. 이는 잘 보이는 것과 오래 남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완주 후에 남는 것.
기록, 기억 그리고 그 대회의 진정성이 담긴 굿즈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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