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ㄷㅣㅁ Aug 26. 2024

16. 저 출근해요!

고시생 카스트 최종

지옥철 속 고시생

출퇴근길 지옥철.

들어만 봤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출근이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 엄밀히 말하면 우연히 그 시간대에 지하철은 탄 적이 있으니 경험은 해봤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어릴 땐 별생각 없었는데, 어느새 나이가 들어 학교보단 회사란 말이 익숙해지고, 교수님보다는 부장님이 입에 붙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취직한 친구들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사직서를 품고 산다는 직장인이라면 내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 싶을 수 있겠지만, 나도 여러분과 우리가 되고 싶다.




고시생의 신분은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다.

아직 학교를 다니는 재학생이라면 고시생은 학생이라는 본체 위에 덧씌워진 일종의 슬롯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본체가 고시생인 사람은 마치 랜덤으로 캐릭터를 설정해 놓은 기분이다. 매일매일 마주하는 나의 모습이 어떨지 눈을 떠야만 알 수 있는. 시험이 끝나기 전이야 당연히 상관이 없지만,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는 매일 아침 나는 하루는 백수가, 또 하루는 취준생이, 다른 하루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되어 있는 기분이다.



작년 이맘때 즈음 혼자 일본 여행을 다녀왔을 때, 출입국서류를 작성하며 직업란에 습관적으로 학생을 적는 나 자신을 보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졸업한 지가 언젠데 언제까지 학생 코스프레를 해야 하는 걸까.

고시생은, 직업도 신분도 아닌데, 그럼 사회에서 난 뭘까...?


'고시생 카스트'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회에서 명명하는대로 그룹화되지 않는 지금 나의 상태, 그리고 그 안에서도 나뉘는 우리의 계급.



내가 원하는 건 일상이었는지도

인턴면접에서 떨어지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데, 그때가 아마 퇴근시간대였나보다.

직장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지하철 하나를 그대로 보내고, 그다음 지하철에도 겨우 몸을 욱여넣었다.

손잡이를 잡지 않았지만, 꽉 들어찬 사람들은 서로를 지탱해 주어 서 있는 게 난지, 서 있음을 당하는 건지 모를 기분으로 무사히(?) 지하철의 흔들림을 이겨낼 수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했던 건 인턴이 아니라 일상이었는지도 모른다고.

규칙적인 일상.

매일 반복되는 하루.

나는 어쩌면 그걸 원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떠야 할 이유가 있고, 씻고 단장해 향할 곳이 있고, 내가 있어야만 돌아가는 일이 있고, 그렇게 열심인 끝에는 기다려지는 퇴근이 있고, 주말이 있고.

누군가는 쳇바퀴 같은 인생이라 할지 모르지만, 언제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정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내게 가장 부러운 건 내일이 정해져 있는 삶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아침 눈을 떠야 할 이유가 없고, 갈 곳이 없어 몸도 마음도 헤매는 그런 삶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저 출근해요!

올해도 시험이 끝나자마자 거의 바로 작년에 이어 용돈벌이를 위한 과외를 시작했다.


새로 구한 수업과 더불어,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와 수업을 하겠다고 해주신 감사한 학생분들도 있다.

기존 학생분들에게는 사전에 수업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는데, 나야 올해 시험이 끝나고도 과외를 계속해서 할 계획이었던 터라 3순 기간에 해당하는 3-6월 약 4개월 정도만 쉴 예정이었지만, 그 기간동안 영어를 쉬어버리면 학생분들이 손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감사하게도 기꺼이 날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3분과는 올해 시험이 끝난 후부터 수업을 다시 하고 있다.


솔직히 나 같으면 궁금해서라도 4개월 동안 뭐 했냐고 물어봤을 것 같은데, 배려인지 무관심인지 모를 그들의 침묵 덕분에 내 정체가 탄로 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쨌든, 시험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계속 경제활동 비슷한 걸 하고 있었음에도 이건 내가 원하는 류의 일상이 아니었다. 학생분들이 모두 직장인이다 보니 내 수업은 이들이 퇴근한 이후에 진행된 데다가, 온라인 수업이라서 집에서 하루종일 시체놀이를 하다가 잠옷차림 그대로 대충 모자로 몰골을 가리고 수업한 적이 더 많았다.


나도 남들 출근할 때 출근하고, 퇴근할 때 퇴근하는 그런 일상을 갖고 싶었다.

내가 인턴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공백기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기다림을 핑계로 망가져버린 일상을 회복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그 일상을 가지면 됐다.


정규직이든 인턴이든 취업을 하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내켜하지 않는 구직자를 그들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과외 사이트에 올려놓은 프로필로 연락이 왔다.

기업체 영어 출강을 중개하는 회사에서 내게 출근 전 아침수업을 제안해 왔다.

이른바 갓생을 사는 직장인들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출근 전 영어수업이라니, 진짜 대단하다 싶었다.


급여를 포함한 조건이 그리 나쁘지 않았고, 위치도 마음에 들었다. 내 오랜 짝사랑의 대상이 있는 바로 그곳. 같이 공부한 친구들 중에는 그쪽으로는 약속도 잡지 않는다는 애들도 있지만 난 오히려 스토커처럼 기다림의 시간 동안 그곳에 가는 걸 좋아했다. 아련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전하고, 사진도 찍고.... 간혹 내가 뜬금없이 그곳 사진을 찍으면 외국인 관광객들이 명소나 관광지인 줄 알고 나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그냥 정부청사라고 머쓱하게 대답하며 자리를 피했었다.


어쨌든, 고시를 시작한 이후에도 꾸준히 영어수업을 해왔던 터라 그쪽에서 추천한 내 프로필을 고객사도 만족스러워했다고 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일자리를 제안받은 지 이틀도 되지 않아 일사천리로 채용이 확정되었고, 그렇게 난 매주 월수금, 오전 8시 출근이란 걸 하게 됐다.

비록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 수업이라 왕복이동시간이 근무시간과 비슷하지만 어차피 백수라 가진 게 시간인데 뭐 어떠냐 싶은 마음이다.




오늘도 오전 6시에 일어나 씻고 단장을 하고, 아침을 먹으며 오늘 수업할 자료를 가볍게 훑어본 후 지옥철에 몸을 싣었다.

빽뺵하게 심어진 모처럼 지하철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꼽혀 정해진 목적지에 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렜다.

어디까지나 아직까지일 수 있겠지만 :)


처음에는 ‘협력’이라고 써 있는 출입증을 어디에 찍어야 할지, 미로 같은 회사 내부에서 화장실과 강의실로 쓰일 회의실은 어디인지, 우리 삼촌뻘인 학생들에게 (내 학생들은 모두 직급이 부장이다.... 하하 부담스러워라...)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서툴고 낯선 것들 투성이었지만, 2주 차에 접어드는 오늘 아침공기도, 회사에 가는 길도, 출입증을 찍고 회의실까지 가는 발걸음도, 학생들도 모두 익숙하고 편안해져 가는 걸 보니 이제 제법 내 일상으로 자리잡았나 보다 싶다.




영어강사인데 와인도 추천해 드리고 요리도 합니다.

아 그리고 출근한 김에 한 시간 수업하기는 아쉽고,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해볼 수 있겠나 싶은 일을 해보고 싶어 여기저기 기웃대던 중 요즘 핫하다는 거리에 새로 오픈한 와인바에서도 일하게 됐다.

사장님도, 함께 일하는 다른 분들도 모두 너무 나와 잘 맞아서 면접을 보러 간 날 사장님과 서로 '너 내 동료가 돼라'하는 마음으로 근무를 확정 지었었다.


와인바이지만, 내가 근무하는 시간은 내 아침수업이 끝난 이후 점심타임이라서 브런치 메뉴도 판다.

아 물론, 사장님은 내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걸 전혀 모르고 뽑으셨는데, 내 요리를 먹어보고는 이게 웬 횡재냐고 좋아라 하시며 내게 '갓'디귿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장님도 일을 벌여놓고 보는 스타일인 게, 점심근무 나 혼자 하는데 ㅋㅋㅋㅋ 나 요리 못했으면 어쩌려고 하셨을는지.... ㅋㅋㅋ...

여튼 그래서 난 와인바에서 셰프 겸 바텐더 겸 캐셔 겸... 그냥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다행이게도 이런 능동적 주도적 근무환경이 나의 성향과는 매우 잘 맞는다.

예전부터 새로운 걸 만들고 일궈나가는 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재밌었던 터라, 대기업 프랜차이즈와 달리 매뉴얼이나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갓 오픈한 이곳이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엔프피답게, 한 때 요식업의 꿈 또한 가졌었던 만큼 인테리어부터 메뉴까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재미있다.

책임 없이 가게운영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 같달까.


게다가 자기 사업에 대한 프라이드와 비전으로 무장한 사장님도 배울 점이 많다. 경영철학이나 스펙터클한 그의 인생사를 듣는 것도 아직까지는 즐겁다. 물론 약간 박찬호 스타일이라 조만간 고막에서 피날 수도....ㅎㅎ

아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직원복지가 짱이라는 거. 와인이며 요리며 양심껏 먹을 수 있는데 이 가게에서 통용되는 양심이 꽤나 넓고 깊다. 평생 마셔 볼 와인 여기서 다 마시고 갈 테다!!!



그래서 영어 수업을 마친 후에는 집이 아니라 와인바로 향한다. 집-회사-와인바. 동선 진짜 끝내준다.


와인바는 아직은 브런치를 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이 많이 없다.

그래서 사실상 나의 자유시간인데, 일 안 하고 돈 받는 게 마음이 영 불편했다.

마음 편하게 가지라고, 원래 사업은 이런 기간도 필요한 거라고 사장님께서 편하게 있으라고 하셨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힘들더라.

그래서 요즘엔 사장님의 허락 하에 신메뉴 개발에 힘쓰며 틈틈이 와인공부도 하고 있는 중이다.

아 그리고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내가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우연히 그걸 알게 된 사장님 부탁으로 브런치 메뉴판도 그리고 있다.




어쨌든 그리해서, 아침엔 영어강사, 그리고 낮에는 매니저라 불리는 일상을 갖게 되었다.


자유시간이 줄어든 게 아주 조금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리고 바쁜 일상의 틈새를 마음속 깊숙이 내재한 불안함이 파고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 새로운 일상이 썩 마음에 든다.

곧 여행을 가게 되는데, 이젠 출입국서류 직업란에 적을게 두 개나 생겼다는 사실이 뭔가 기분이 좋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가능할지 끝이 너무 분명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외칠 수 있다.

저 출근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15. 괜찮은 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