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암흑기를 맞은 나에게
다채로운 것이 좋아졌다. 흰색은 색이 아니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 꽃을 보면 슬픔이 이때다 싶게 찾아왔다. 흰 벽에 흰 침대, 창을 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창 밖은 맑든 흐리든 간에 다채로웠다. 창 밖으로 흰 눈이 나풀거릴 때, 나는 창 안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꽃들이 나풀거릴 땐, 마침내 봄이 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슬픔과 안도를 오가는 나의 감정들은 다채롭지가 못해서 때론 마시지도 못할 커피를 사서, 눈앞에 내려놓았다. 나의 창에 여러 색을 부러 배치해 놓고, 초록색 책을 들었다가, 붉은색 책을 들었다가 했다. 가만히 두면 쉽사리 잿빛으로 변하는 나의 풍경들을 보고 있자면, 나의 머리까지 희게 될 것이기에, 분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이끌고 제주로 갔다. 주황, 빨강, 초록, 그리고 파랑의 색을 보고 싶었다. 색을 꽉꽉 채워 넣은 나의 배경 안에 티 없는 나의 아이들을 그려 넣으면, 나는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되었다. 마치 물 위에 유유히 떠있는 것처럼, 나는 그 안에 몸을 싣고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곳엔 바람마저 색이 있었다. 파랑은 아니었고, 가만있자, 봄 바다의 색이었다. 머리칼이 사라진 나의 목덜미 위로 바람이 스치면, 젖은 바다의 냄새가 낫다. 코가 아닌 목 뒤로 맞는 바다 향. 그것은 바다로 뛰어드는 아이들을 말리지 않고, 나까지 함께 뛰어들게 하는 냄새였다. 젖은 치마를 말릴 겸 산책을 나섰는데, 치마가 다 마르기도 전에 책 한 권을 샀다. 제주에 왔으니, 제주 책을 사야지. 제주의 구석구석을 그린 책은 다채롭고 싶었던 나의 마음 구석구석을 만져주었다.
크게 한 일은 없었다. 늦잠과 수영(아이들과 남편만 했지만), 산책과 감탄.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이런 여행은 사실 처음이었지만, 살면서 가장 약한 몸으로 가장 강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휴식은 이렇게 하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이제 조금은 색을 찾은 기분이랄까. 빡빡이 었던 나의 빛나는 머리에도 1센티 미터만큼의 머리카락이 자랐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할 것 같았던 불모지 같던 마음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무언가가 이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흰 종이 위에 커서만 깜빡거리던 나의 마음.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덮어 버려야 했던 나의 마음에 한 줄 쓰는 날이 찾아왔다. 아이들과 깔깔 거리며 읽었던 ‘달팽이 학교’라는 그림책에서 마음은 세상 바쁘지만, 몸은 세상 느린 달팽이 선생님처럼, 목표를 향해 느리게 질주하던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쉼이었다. 아프지 않고, 쉬는 것. 빛없는 나의 눈동자에 아이들을 담고, 다채로운 빛깔들을 색 없는 나의 몸뚱이가 마음껏 빨아드리는 그런 여행.
언젠가 아이가 무지개 색 말과 무지개색 하늘과 무지개 색 모래 위에 파란 바다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때처럼 제 색을 가진 바다가 예뻐 보인 적은 없었다. 혼재한 색들 위로 제 빛을 드러내는 단색의 무언가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 줄 쓰고 기뻤다.
분주해질 만도 한데 아직 느리게 살고 있다. 이제 막 인생의 하향 곡선에 점을 찍었다. 천천히 올라가 보려고. 소실점 하나를 더 찍고, 입체적으로 살아보려고. 속도 내지 않으려고 한다. 무거운 공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가는 볼링처럼 마지막 순간 코끝을 잘 보고 굴려 볼 것이다. 한 발짝 한 발짝 힘을 주어 걷고, 가끔 도랑에도 빠져보면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굴려 볼 것이다. 하이틴 무비의 주인공처럼 즐기면서 하면 따라올 자가 없으니까.
슬픔이 다정함에 못 이겨 무기력해질 정도로 천천히 다정하게 굴 것이다. 재촉하여 내쫓지 아니하고, 나에게 시비 걸어오는 인생에게 쓱 손 잡아 줄테다. 오늘도 아이들에게 받은 포옹을 남의 편에게 돌려주었다. 어이없어 피식 웃더라. 핑크가 노랑이 되었지만, 사랑은 사랑이었다.
아직은 잿빛이지만, 사랑을 끌어다 쓸 힘만 있으면, 나는 충분히 다채롭다. 나는 사실 다정하지 않지만, 다정한 나의 사랑들로 어제보다 오늘 더 다정하다. 언젠가 어둠이 그 힘을 잃고, 천천히 내 자리를 다시 내어줄 때까지 조금씩 더 다정하고, 더 다채로워져야지. 나의 불모지를 같이 걸어 준 많은 이들에게 소리 없이 봄처럼 다가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