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나무처럼 겨울 앞에 서서
아침에 눈을 떠 베이글과 함께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고, 필라테스를 다녀와서 늦은 출근을 하는 삶, 여행을 계획하고 또 가끔 전시를 보며 마음의 위로를 얻는 삶, 우리의 삶이 반은 그러하고 또 반은 그러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로운 삶을 우리는 동경한다.
얼마 전 한 CEO의 책이 나오자마자, 그의 기업에서 노동자가 과로사하는 일이 있었다. 사업가로서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그를 많이들 좋아했고, 또 그의 삶을 동경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여유가 한 청년이 마땅히 가져야 할 하루의 절반에서 얻어졌다는 결론에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나 또한 꽃이나 그림처럼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기에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의 삶이 더욱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모순적일지라도 모순 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삶, 나의 개성을 존중하듯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삶, 나의 돈과 시간이 중요하듯 다른 이의 돈과 시간도 아끼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글을 쓰지 못하는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와 더불어(?)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고, 아이가 수술을 했고, 또 아버지도 쓰러지셨다. 한 해에 일어난 일이 맞나 싶을 정도의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삶의 여러 순간들이 소설이나 영화처럼 느껴졌다. 우습지만, 영화처럼 살고 싶다는 말이 이런 말은 아니었는데... 하고 하늘을 바라봤던 적도 있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구구절절하게 하는 이유는 슬픈 이야기들을 글에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위해서다. 글과 마찬가지로 나의 삶은 화려하지도 유려하지도 않고, 때론 너무나 잔인하고, 또 모순적이라 그러한 발자취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이야기는 전체 소설의 아주 작은 일부처럼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파도 끝에 선 기분, 그 끝에서 떨어져 버릴 것인지 아니면 보드를 탈 것인지는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는 슬프게도 삶의 고통 중에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언저리에 있는 이들을 돌아봐야 한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고, 아르바이트비를 한 달이나 못 받아도 말 한마디 못하고, 계속 아프고, 계속 다치는 사람들, 헤어지고, 갈라 서고, 그럼에도 또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 자신의 고통을 도구 삼는 사람들 말고, 살기에 바빠서 삶의 여유 따위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글이 필요함에도 가장 글과 먼 사람들이기에.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이제 우리 사회는 빛 말고 어둠에 집중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어둠을 그대로 둔다면 빛마저 삼켜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에 슬프고 어두운 면을 모른 채 할 것이 아니라, 화려한 삶 뒤에 얼마나 많은 삶이 스러져가야만 했는지를 헤아려야 할 때이다.
떨어지는 계절인 11월이 힘들다. 줄곧 화려한 글솜씨도 유려한 문장도 익히지 못했지만, 줄곧 다짐한다. 이 가을을 그대로 보내지 않겠다고. 나의 겨울이, 또 봄과 여름이 맞닿은 사람들의 온기로 살아졌듯이, 누군가에게 닿아 있겠다고. 벌거벗은 나무처럼 준비된 채 겨울을 맞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