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에서 영화로
“진짜 좀 알아서들 좀 하시라고 해!”
남편은 아이들을 재우기 직전인 8시 45분에 한 시간 째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아버님이 편찮으신 후, 두 형님은 의절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쇼핑몰에서 옷을 구매한 카드 결제 환불을 두고 큰 형님의 말을 작은 형님에게 전달하고, 작은 형님의 말을 큰 형님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울화통이 터졌다. 삶에서 시트콤 같은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이 지금인가. 나 혼자 화나는데, 전체 그림을 보면 정말 웃길 노릇이었다. 삶의 희로애락이 있다면, 지금은 ‘락’ 빼고 다 있다 해야 하나. 그렇다면 내가 ‘락’ 파트를 맡으리라. 미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요즘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 늘 나만 생각하던 내가 이제야 좀 주변을 돌아볼 줄 알게 되었는데, 주변이 정말 엉망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매일 다투고, 매일 고래 등에 새우가 터진다.
‘형님(여기서 형님은 큰 형님), 아버님이 편찮으신 게 작은 형님 잘못이에요? 아니죠? 제발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형님(여기서는 작은 형님), 형님만 먹고살기 바빠요? 큰 형님은 혼자 애도 키우고 아버님도 봐요! 제발 애도 없고, 남편도 있는 형님이 좀 하세요!’.
마음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적어도 ‘락’ 좀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즐길 줄 알아야 했기에, ‘강남스타일’을 틀었다. 그리고 애들도 틀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기에, 침대 위로 애들을 세우고, 불을 켰다 껐다 하며, 강남스타일에 맞추어 막 춤을 신나게 흔들었다. 그리고 동영상을 형님들에게 보냈다. 형님들은 ‘얘네 왜 이래’ 하면서 웃으면서, 옷값 이만 삼천 원은 까먹으신 듯했다.
최근 이런저런 마음의 위로가 되는 책과 글을 탐색하면서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현대 사회의 마음의 병과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많이들 이야기하던 부분이 친절하기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죽겠는데, 무슨 친절을 베푸냐. 친절도 마음과 시간과 돈이 든다. 그보다 먼저 자신을 돌봐라. 심리학을 전공하지도, 관련 분야에 빠삭하지도 않지만,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기도할 때 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할 때 더 행복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나면 그 시간 동안은 행복할지 몰라도, 때때로 참혹하기까지 한 나의 삶으로 돌아오면 남은 것이 없었다(살이 남았다고 하면 남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기도하며 얻는 기쁨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았다. 나는 형님들에게 큰 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 전부 힘들어요! 하지만 가족이잖아요! 사랑하잖습니까!’
흡사 군인 같은 나의 외침이 들리지 않으셨을 리가 없다.
친절하게 말하는 것. 아주 힘들다. 때론 친절의 지옥에 갇혀, 나를 공황장애의 늪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친절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면 안 된다 생각한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친절한 것은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결국엔 내가 행복하게 되는 일이다. 거짓된 말을 뱉으라는 것이 아니다. 가시 돋친 말을 뱉기 전에, 잠깐, 아주 잠깐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가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탈모가 되게도 하고, 머리가 쑥쑥 자라는 기적(?)을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솔직히 형님들 사랑하지 않았었다. 내 남편의 누이니까 사랑해보려 한 것이지. 그런데 남편을 사랑하는 누나로, 내 아이들을 사랑하는 고모로, 아버님을 사랑하는 딸로 보니까 싹이 트더라. 종국에는 사랑하게 될 싹.
혐오와 미움이 판치는 세상에서 친절과 사랑을 외치는 마이너(?)로서 내 가족도 네 가족, 네 가족도 내 가족인 지구촌 한마음 캠페인을 주장해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희노애락락락’이다. 그리고 내게 ‘락’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잘하자. 친절하자.
시트콤에서 영화로 바뀔 당신의 삶을 응원한다. 친절!(충성의 말투로).
p.s. 사랑한다, 남의 편, 내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