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지 않는 글쓰기
솔직히 훔쳐보는 것은 참 재밌다. 영화도 어떤 사건에 대한 관찰이 그 시작이었고, 다른 이의 삶을 훔쳐보고자 하는 욕구가 영화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히치콕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창>이라는 영화는 대놓고 관음증적 시선에 초점을 맞추고 영화를 그려 나간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대놓고 훔쳐보고, 그래서 더 스릴(?) 있다. 그러나 영화에 끝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훔쳐보는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이는 자기 성찰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훔쳐보는 행위는 재미는 있지만, 그만큼 책임이 뒤따른 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글을 쓸 때에, 훔쳐보기 직전의 단계인 삶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머물러야 한다.
Be curious, not judgmental – Walt Whitman
‘선을 넘지 않는 것’은 늘 어렵고, 같은 맥락에서 삶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렵다. 호기심은 유지하되, 삶을 판단하지는 말아야 하기에 한 끝(?) 차이를 늘 유념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이의 삶을 훔쳐보는 이가 된다. 관찰자의 눈을 유지해야만 그 대상의 감정이나 상황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신으로 군림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특정 장르에서 저자가 캐릭터에 깊이 몰입하여, 본인과 동일시하거나 대상에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는 일이 벌어지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는 삶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절대’라는 것은 없지만, 사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 다른 이의 삶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편이 좋다. 지속적으로 어떤 삶을 관찰하다 보면, 한결같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 있는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거나 혹은 별로다 라는 감정이다. 이 또한 나의 감정적 판단이자, 비판일 수 있겠지만, 어떤 이를 몇 년에 걸쳐 지켜보다 보면, 처음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를 알게 되고, 또 우리가 아주 쉽사리(특히 첫인상에)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내, 놓쳐버린 인연에 대한 후회나 혹은 상황을 알지 못하고 쉽게 판단해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이 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후회’ 하지 않기 위해서는 ‘Be curious, not judgmental’ 이란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나 SNS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는 이 시대에서 이러한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소당하는’ 실수를 면할 수 있다. SNS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잘 꾸며진 삶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기표현의 출구이자, 의사소통의 통로로서 순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꾸며진 삶’을 진실로 믿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실패자’로 판단하거나, 혹은 다른 이를 시기, 질투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즉, 보이는 모습을 궁금해하고, 축하 혹은 격려할 대상으로 삼지 못하고, 그의 삶이 늘 그렇게 행복할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섣부른 판단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좌절하여 실패자로 거듭난다. 이때, 우리가 보이는 모습, 그 자체를 그 사람의 삶 전체로 믿지 않고, 그저 삶의 일부 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관찰자로서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나’의 마음을 지켜낸 것이다. 나도 모르게 받는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할 때, 날카로운 말이나 공격적인 태도로부터 다른 이 또한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예전에 ‘심리 상담’에 관한 책에서 상담의 기본은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삶을 지켜보는 태도를 유지하고, 절대 쉽사리 판단하지 않는 것, 그것이 상담의 시작이다.
즉, SNS를 하든, 글을 쓰던, 혹은 조언을 하던 간에, ‘절대’ 상대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꼭 필요하고, 이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갖추어야 할 태도라고 생각된다. 이는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 거듭나기 위한 다짐이기도 하다.
글쓰기를 통해 배우는 것들은 꼭 삶에서 다시 쓰게 되고, 이는 다시 글쓰기로 이어진다. 특히 삶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것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글을 쓰는 아주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이것이 글을 쓰는(특히 에세이를 쓰는) 이유일 수 있겠다. 처음에는 에세이가 나를 보여주는 일종의 사진 같은 것이었다면, 점차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의 삶의 태도를 구축하는 통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때, 자기 치유적 성격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삶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글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하는 이 다짐의 글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되든지 간에 보다 성숙한 글쓰기를 하는데 밑바탕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당신의 삶에 관심이 있고, 당신을 아끼며, 당신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