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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h Aug 19. 2021

‘아들, 엄마는 카페를 좋아해’

배고픈 자가 예술을 말할 때

‘엄마, 바다 가자’ ‘그래’

‘엄마, 계곡 가자’ ‘그래’

‘엄마, 놀이터 가자’ ‘그래’

‘근데, 아들, 엄마는 카페 좋아해’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아들은 이내 시무룩해지더니, 금세 얼굴이 해 같이 밝아져 ‘엄마, 키즈카페 가자, 그럼’ 하고 웃는다. 사랑스럽기 그지없지만, 엄마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님을 아들은 알까.


  나뿐만 아니라, 커피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우리는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지 않는다. 향과 음악을 마시고, 잔과 창을 보며, 때때로 꽃과 사랑을 나눈다. 혼자 있더라도 같이 있는 듯하여 외롭지 않고, 같이 있어서 더 가득 찬 느낌을 공유하는 곳, 그곳이 카페다.

요즘 나는 값진 일을 업으로 하고, 원하던 글을 쓰며, 아이들을 더 많이 볼 수 있음에 감사하는데 왜 때때로 불행한지 생각하다 생각이 이른 곳이 카페였다. 고작 카페 때문에 우울할 수 있나 생각하다가도, ‘제일 좋은 것 하나를 못 하니까 병이 나지!’ 라며 스스로 죄책감에 대한 이름표를 달았다. 남들 다 하는 홈카페라도 만들어 볼까 생각했지만, 곧 의미 없는 소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랫말처럼 카페와 같이 하는 시간이 그리웠다.


  요즘엔 어떤 일을 하던, 일이 잘못되면 코로나 탓을 하게 되었는데, 카페를 못 가게 된 것도 코로나 탓이 컸다. 같이 갈 사람이 없고, 오래 머무를 수 없고, 무엇보다 시간과 돈이 없다. 삶이 팍팍할수록, 더 자주 머무르던 곳이었는데, 이제 가진 여유를 다 써도 하루에 5천 원은 사치인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세 가지, 꽃과 커피, 춤. 어느 것 하나 예술이 아닌 것이 없다. 다른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겠지만, 내게 이 셋은 전부 예술이다. 사람 이야기를 하고, 사랑이야기를 할 때, 나는 늘 꽃을 떠올린다. 꽃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한다고 말하고, 함께하는 이와의 시간에 커피를 곁들이면 세상이 춤춘다. 그리고 그 시간을 먹고 자란 우리의 삶은 다시금 예술이 된다. 주인공으로 사는 삶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참 모순적인 삶을 사는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써 내려가는 ‘삶’이 주인공의 그것과는 아주 멀다는 생각을 한다. 후회와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삶의 가장자리에서 스스로를 밀어 넘기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면, 또다시 커피가 마렵다(?). 답답함을 깨끗이 씻어줄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 차갑고 검은 목 넘김이 나를 모서리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려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잔 시원하게 마시고, 따뜻한 라테를 다시 시키고 싶다. 얼어붙은 속이 그 온기로 잠시 ‘중심’을 찾을 수 있게.  


  여유를 잃은 부모가 많이들 그렇듯, 육아 서를 들고 한참을 서성거리는 나날들이 많아졌다. ‘소리치지 않고, 때리지 않고’라는 책을 읽고, 또 읽다가 툭 던지고, 믹스 커피를 한잔(믹스 두 개) 타서 후루룩 넘겼다.

‘그래, 소리치지 않고 때리지 않으려면, 커피가 필요해’

답답한 스스로에게 던지는 농담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리고 동네 언니들(?)의 얼굴이 거뭇해져도 위로 대신 커피를 건넸다. 그럼, 우린 또 금방 자학하는 농담과 남의 편(남편) 이야기에 웃었다. 그러다 우리가 드라마나 개그로 받는 위로가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로 예를 들었지만, 어떤 삶이든 울만한 일들은 많다. 웃고 살면 좋겠지만, 작은 미소로 큰 눈물을 삼킬 뿐, 늘 웃고 사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싶다. 혹자는 몸에서 빠져나간 정신을 ‘번쩍’하고 찾아줄 커피를 찾으며, 우스게 소리로, ‘커피 수혈할 시간’이라고들 하던데, 집어삼킨 눈물만큼 몸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어서 마셨는데, 삶을 집어삼키는 것은 술만으로  충분하다. 커피만큼은 계속 친구로 남아주길.


  배고픈 자가 예술을 말할 때, 예술하기 어려울 때, 그와 비슷한 것을 찾을 때, 그 가까이에 커피가 있는 듯싶다. 자유롭지 못한 묶여 있는 삶에 커피는 그저 거들뿐, 무언가를 내어 달라 하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커피값 5천 원에는 자유와 공간과 예술의 값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공간의 값을 뺀, 3천 원으로 테이크 아웃해야겠다. 그래도 여전히 자유와 예술은 살 수 있으니까.


  예수님은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배고픈 예술가로 남고 싶기에 커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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