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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h Aug 13. 2021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다

나는 세상의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가 도미노처럼 세상을 무너뜨리고 있던 때에 나는 인생의 롤러코스터의 최고점에 위치해 있었다. 앞으로 수직 낙하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채, 한국의 친구들보다 6개월 빠른 졸업을 맞은 나는 두렵지만 설레었다. 대학을 가기 전까지 넉넉한 시간이 있었다고 착각했던 나는 세상이 내게 굉장히 우호적이고, 나 스스로 나를 돕는다면, 하늘도 내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금융위기는 무섭게 국가와 경제, 가정을 무너뜨리고, 나는 무방비인 채로 미국에서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왔다. 라떼는 고2 때 갑자기 바뀐 교육과정으로 인해 좌절에 늪에서 허덕이던 친구들이 나처럼 도피성 유학을 떠나거나, 자퇴하거나, 혹은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비단 그때만의 일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으나, 당시의 우리는 우리 나름의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그렇게 떠난 도피성 유학의 끝은 금융위기와 함께 아주 빠르게 낙하했다.


  xy 세대의 끝자락에 태어나 밀레니엄 세대라는 이름을 달고 산 우리는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았다. 나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보다는 성적에 맞춰 대학에 갔고, 금세 취업에 문턱에서 허우적댔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여기며 죽어라 살던 때에 내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 실패한 적 없이 희망을 먹고살던 우리는 그때 정말 실패한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사실 필름식 카메라가 익숙했지만, 곧 값비싼 디지털카메라를 샀고, 도깨비 언어를 쓰며 꾹꾹 눌러 담던 편지 대신 카톡을 이용하게 됐다.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빠르게 적응해야 했던 우리는 흔들리는 갈대 같은 정체성을 얻었다. 우리의 부모는 둘만 낳아 우리를 애지중지 길렀는데, 내게 남은 정체성은 흙수저였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나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혹은 나의 노력이 얼마나 값진 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금수저로 태어나 부모가 차려준 카페에서 놀고먹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실용적이고 단호한 Z 세대가 부럽고, 두려워졌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았고, 나보다 훨씬 뛰어난(뛰어나 보이는) Z 위주로 돌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 어렸을 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학생 때는 공부를 잘하고 싶었고, 취업할 때는 은행원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엔 아무것도 안 되고 싶고, 비트코인으로 한방을 노리고 있다. 노력이 값지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일까, 물질만능주의, 성과주의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 인지도 모른 체, 많이 불행하다. 감정에 휩싸여 생각에 늪에 빠지는 것은 늘 나쁘다 배웠는데, 억눌린 감정은 결국 봇물처럼 터져 공황장애가 온다. 세상의 중심들은 결국 스스로 패배자를 자처하고, 세상의 구석에 나를 처박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나의 세상은 이제 끝난 것인가? 이렇게 혐오나 염세주의에 빠진 채 생을 마감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갖게 될 때쯤, 나는 나에 대해 알고 싶어 졌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면 나는 세상에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 미성숙한 나


하인즈 코헛은 어린 시절 충분한 공감을 받아야만 유아기에 가지고 있던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애를 벗고 성숙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공감보다는 다른 이에게 상처 받으면서 조금씩 나의 세상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공감을 하기보다는 공감하는 척을 먼저 배웠다. 사실 나의 세상은 아직 나를 중심으로 돌지만, 네 바퀴로 세상을 굴리려 하고, 그렇게 억지로 뀌어 맞춘 바퀴들은 삐걱 거리며 잡음을 내게 된 것이다. 결국 성숙하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인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 우리는 공감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그 미움은 혐오로, 결국 그 혐오는 자기부정, 자기 폄하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낳아 공황장애를 겪게 한다.


즉, 우리는 아직 어린아이 같고, 자기중심적이지만, 타인과 살아가기 위해 아닌 척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미성숙한 우리 스스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한 방책으로 MBTI 성격 유형 검사나 애니어그램 등에 열광한다. (이 검사들은 처음 의도된 바대로 자기의 성격과 성향을 파악하고, 자기 발전을 도모하며, 나아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혈액형으로 성격을 파악하듯 나를 어떤 형태로 규정짓는 데에만 쓰인다는 문제점이 있다. )


- ‘ENTJ’는 누구인가


여러 번 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게 되는 이 마법 같은(?) 검사는 언변 능숙형이라는 프레임을 내게 준다. 다만 나는 나를 그것으로 규정하지 않고, 나의 가치에 힘을 싣는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를 알기 힘쓰면 저절로 조금씩 성장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지 간에 나를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나의 현실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그려낸 나의 이미지로 나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ENTJ가 누구인가라고 썼지만,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나에게 유익한 것이기에 내가 나를 아는 것으로 이 답을 대신하고 싶다.  


- 애니어그램 4번, 예술가형

이도 마찬가지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성격 유형이 나왔고, 내가 이해하는 나와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긍정적인 날개를 펼치는 데 도움을 줄 것임을 믿는다.  


밀레니엄 세대로서 xyz 세대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나는 미성숙한 인간이며, 변화하는 시대에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잡고 창의적인 활동을 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 이외에 어떤 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이 나 스스로 알기를 도모하는 데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전부 다르고, 우리의 세상은 맞물린 채로 어렵게 굴러가고 있지만, 나를 아는 것만으로 그 세상의 주인은 내가 된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삶이고 너와 나의 세상이기에. 나는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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