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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h Nov 10. 2021

여행이 늦어졌습니다.

여행의 이유 - 쉼과 정리.

세상 스펙터클하고, 멋진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더니…


  해리포터로 떠나는 기차는 출발도 못하고, 연착되어 버렸다. 가족이 아파서? 일이 바빠서? 결국 사는  바빠서라는 이유로 귀결되는  이유들은 글을 쓸시간은 지만, 읽을 시간은 없다는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시동을 걸어보려고 했는데, 여간 어려운 게아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꺼내, 한참을 읽었다. 고작   읽고, 한참이라 말하기 부끄럽지만, 시간은 정말 한참이었다.   읽고, 슬프고,   읽고, 시가 떠오르고,    읽으니, 벌써 출근할 시간이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여행을 가려면, 시간을 내야 하는데, 내가 지금 굴리는 저글링은 공이 너무 많아서, 하나를 뺐다가는 전부 떨어질 것만 같다. 아무래도 슬쩍  하나를  밀어 넣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다 바쁘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을 텐데?’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지만,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게 정말 내 진심이다. 핑계를 붙잡고 계속 미루던 일을 푸념 같은 이 글로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시작해야지… 시작해야지… 되뇌는 것을 이제 그만두고, 정말 시작해야지! 심리학 적으로 게으름은 완벽주의에 기인한다는데, 책 읽는데 완벽을 기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냥 시작하면 되지. 그래서 오늘은 마법사의 돌을 읽어본다. 오늘 밤은 분명 긴 밤이 될 것 같은데, 그전에 굴리던 공부터 내려놓아야겠다. 아버님 병원 클리어, 애들 숙제 클리어, 설거지 클리어, 아직 군데군데 늘어놓은 할 일 공들을 정리는 해야겠지만,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 떠날 수 없는 자, 즐기기라도 해야 한다. 세상을 차단하고, 나 스스로 방에 나를 가두는 일. 엉뚱하고, 어리석은 짓인 것 같지만, 내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유미의 세포들’ 이란 웹툰에서 보면 프라임 세포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사람들에겐 누구나 자신을 대표하는 세포가 있다고 한다. 유미와 동일하게도 나에겐 그것이 ‘사랑’인 듯싶은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때론 넘치고, 심하게 감성적이라 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상처 받고, 지쳐 마음의 썰물에 나를 던져버리게 되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내가 찾은 방법은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아까 나의 공들을 전부 내려놓는다 말한 것처럼, 잠시 이런저런 감정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필요 없는 것은 좀 버리고, 소중한 것은 다시 담는다. 버리는 과정은 대부분 힘겹게 글로 다시 태어나고, 다시 담는 과정은 기쁘게 글로 태어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책과 나만 남기고 세상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시작된다. 마치 명상을 하듯이, 전부 비우고, 좋은 감정들로 다시 나를 채운다. 여기서 좋은 감정이란, 슬픔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용해시킬 수 있는 슬픔, 자기 파괴적이지 않은 슬픔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버려진 나의 어둡고 슬픈 이면들은 글을 쓰는데 아주 큰 자양분이 되어서, 마치 밭에 똥을 주듯이 힘겹게 글의 땅이 된다.


  비옥한 글의 땅은 때때로 아주 빠르게 씨앗을 성장시키는데, 하룻밤 사이에 뚝딱 몇 편을 써내려 갈 때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나를 맡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가끔은 오즈의 마법사에 도로시처럼 태풍에 몸을 맡긴 채, 여행을 떠난다. 멋진 여행을 떠날 것이 분명하기에.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회피하는 거라고. 문제의 핵을 보지 않고, 뱅뱅 도는 꼴이라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어서 감정을 소모하고,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그 말 그대로 ‘도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국 나를 빠르게 현실로 회기 시키고, 더는 소모적인 감정을 배설하지 않게 한다.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고, 감정을 온전히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힘은 ‘감정의 정리’에서 나온다. 감정에 흠뻑 빠져도 보고, 왕왕 울거나, 깔깔 웃어도 보는 과정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내가 바로 감정의 주인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과정, 이것이 여행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진짜 여행이든, 책 속으로 여행이든 말이다. 여행은 회피가 아닌, 쉼과 정리이다.  


  여행이 늦어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자, 다시 한번 떠나보자. 적당히 폭신한 베개와 극세사 이불을 챙기고, 올 F/W 신나게 여행을 떠나보자. 정말, 이불 밖은 위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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