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직업이 뭐야?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안 나오신 날이 있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한 학년에 두 학급의 작은 초등학교였는데, 한 선생님이 학교에 못 나오시면, 다른 학급으로 가서 같이 수업을 받곤 했다.
난, 유치원을 다닌 적이 없었지만,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다 떼고, 내 이름도 한자로 쓸 수 있었으며, 영어 알파벳도 다 외웠다.
막내로 태어나서 언니, 오빠들이 하는 공부를 부러워하면서 아버지한테 한글을 써 달라고 하고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반복해서 외우곤 했다.
그날의 기억도 옆 반 교실로 이동해서 수업을 받고 있는데,
옆 반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산수 문제를 풀라고 하시고는 뒤편에 있는 내 자리에 오셔서 물으셨다.
"아버지 직업이 뭐니?"
중년 이상으로 보이셨던 그 선생님의 질문에
"우리 아버지는 저기 역에서 돌멩이를 나르시는데요."라고 답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선생님은 나의 당당한 대답에 놀라시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 기대한 답변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날의 기억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이었다.
우리 집에서 100미터 거리에 기차역이 있었다.
지금도 기차가 지나가지만, 멈추지는 않는 작은 역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는 사람들이 기차도 많이 타고 내렸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돌을 나르는 일을 하셨다.
가끔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역 근처에 비석 치기를 하려고 돌을 주으려 가면, 해가 어스름 지는 곳에서 아버지의 땀에 젖은 옷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많이 계셨지만 나는 아버지를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역무노동자,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직업을 명사형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옆 반 담임 선생님에게 서술형으로 답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왜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야만 하는지 이상하기만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우리 반에는 담임 선생님이 유난히 예뻐하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자주 문제를 풀으며 자습을 해야 했고, 선생님은 예뻐하는 그 아이를 목말을 태우곤 하셨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특별히 예뻐한 것은, 그 아이에게 예전의 선생님 여자친구와 닮았다고 자주 말하셨는데, 그 이유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청소시간에도 자주 그런 행동을 하셨는데, 그런 사실에 불만과 질투가 섞여
"선생님이 학교에서 저렇게 해도 되는 거야."
이런 말이 내 입으로 나가고야 말았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그 이야기를 교실 뒷문으로 들어오시던 선생님이 듣고 말았다.
나는 그 상태로 '얼음'이 되었고, 선생님은 못 들은 체 하셨지만,
사건은 그다음 날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미처 한글을 다 떼지 못한 남학생과 짝을 해주셨고,
어제 나눠주신 시험지를 집에서 열심히 풀어서 분명히 가방에 넣은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물론 내 옆 짝꿍도 시험지가 없었는데, 선생님은 나를 나오라고 하시면서
"시험지도 안 가지고 다녀."
하시면서, 따귀를 날리셨다.
나는 그 순간, 좌절과 절망감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따귀를 맞는 일이.
자리에 돌아온 나는 다시 가방을 뒤적거렸고,
가방 안이 아닌, 가방 바깥쪽에 붙은 작은 주머니 같은 곳에 내가 시험지를 접어 둔 것을 발견했지만
꺼내지 않았다.
그랬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많이 차별했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학대를 받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부모님이 자주 학교에 찾아오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어린 우리 눈으로 보기에 그것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새엄마와 사는 아이에게는 여러 번 폭행이 시도됐는데,
한 번은 그 아이를 불러 나오라고 하시고는
미처 그 아이가 선생님 앞에 서기도 전에 그 아이의 이마를 밀어서 그 아이가 뒤로 내동댕이치도록 했다.
우리는 모두 그 공포 속에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몸이 굳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내가 선생님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기 전까지, 나를 예뻐하지는 않아도 미워하지는 않았다.
사실 학습면에서 뒤처지지도 않았고, 선생님이 시키는 일을 나름 잘 수행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옛날 교실 창문에는 벌 모양의 종이를 붙이곤 했는데, 그것도 나를 남겨서 함께 하자고 하셨고,
지금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수업 시간에 담배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었다.
88 올림픽의 남은 날짜를 교문 앞에 바꿔 끼우는 것도 내가 담당했던 일이었다.
그건 아침에 와서 선생님의 서랍을 열어서 맞는 숫자를 찾아 끼워 넣어야 하는 일이었다.
선생님에게 나는 나름 활용가치가 있는 아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따귀를 맞던 날, 난 선생님과 그 선생님이 특별히 예뻐했던 그 친구를 동시에 미워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아버지에 대해 자주 묻곤 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 직업은 대학교에서 행정업무를 맡고 계셨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아버지 직업'에 따라 분류한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그 이후, 나는 철이 들면서 담임 선생님이 물어보는 아버지의 직업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란에 '농부'라고 적었다.
사실 논과 밭이 있어서 '농부'도 맞지만, 주된 직업은 역무 노동자를 그만두신 후,
경비원 일을 하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우리 아버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직업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이 또 아버지 직업을 물으셨다.
그냥 '농부'세요.라고 말하면 되는 것을,
"건물을 관리하시고요. 레미콘이 돌아가는 것을 기록하시는 일을 해요."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나름 마주한 선생님한테 솔직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직업명을 몰라도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는데,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직업명을 알았지만, 모르는 것처럼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경비시구나."
선생님은 나의 서술형 답변에도 불구하고, 바로 명사형으로 대답하셨다.
교사가 된 나는,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직업을 묻는 것을 되도록이면 피했다.
지금은 부모의 직업을 적는 부분이 빠져 있고, 묻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 것이 원칙처럼 되어 있지만, 교직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아이들에 대한 기초사항기록란에 항상 부모님의 직업란이 적혀 있었다. 그냥 그렇게 적는 것에서 끝내고, 마주한 상태로 물어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마음을 품은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아버지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아버지는 밤낮으로 정말 열심히 살아낸 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시고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다가 밑에 있는 동생들을 위해 고등학교를 포기하셨지만,
한자도 많이 하시고, 중학교에서 공부도 잘했던 터라 성인이 된 이후에 공무원은 아니었지만,
군청에서 행정업무를 맡으셨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면서 일을 그만두시고는, 엄마와 지금 내 고향인 곳으로 이사를 오셨다.
처음엔 엄마와 국화빵을 구워 파는 일을 하셨는데,
학생들이 많던 시절에 자리가 없어서 앉을 곳도 없을 만큼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과 논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사가 잘 되면서 가게 주인이 대신 그 장사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했다.
모두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언니들의 기억엔 그 가게에 대한 기억들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런 힘든 시절을 견디시면서도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술에 취한 아버지의 모습이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다음날 아침이면 부지런히 일을 나가야 했던 아버지,
역무 노동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셨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인사보다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더 많이 해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작은 컨테이너에서 외롭게 밤을 보내야만 했던 아버지.
집에 오셔서 매일 아버지는 그날 하셨던 일을 기록하셨는데,
그때의 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틀 전에도 아버지가 꿈에 나오셨다.
항상 꿈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는다.
꿈이란 걸 안다면,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텐데 항상 꿈에서도 해야 할 말을 미처 다 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 방학 과제로 시를 한 편 써 갔는데, 그때 시 제목이 '우리 아버지'였다.
내용이 모두 떠오르지 않지만,
'논에서 돌아오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했던 것 같다.
깨끗한 액자가 없어서 집에 있는 낡은 나무 판넬에 종이를 덧 씌워 시를 쓰고, 아버지가 밭에서 쓰시던 하얀 비닐을 씌우고는 모퉁이를 테이프로 둘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그 시가 1등을 했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다는 말, 그 덕분에 내가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말, 그리고 힘든 시간을 아버지로 버텨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
'우리 아버지가 계셔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말'
다시 아침이 시작되었다.
유난히 부지런했던 아버지처럼 나도 오늘 하루도 값지게 살아가야겠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의 딸로서 지켜야 하는 숙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