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 책 빌려줘서 고마웠어

내가 6학년 때 담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by 이생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은 자신이 들어갈 동아리를 결정해 오라고 하셨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말씀드렸고, 엄마는 돈이 가장 적게 드는 곳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문예반에 들어갔다. 원고지와 연필만 있으면 됐기 때문이다. 1988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학교에는 도서관이 없었고, 집에도 책은 몇 권 정도밖에 없었다.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정말 최소한의 지출만을 하셨다. 집에는 5남매 중, 누구의 것인지 모를 책이 몇 권 있었는데,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줄로 된 글 한 편에 안중근 의사를 만화로 그린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일본 순사가 안중근 의사를 양쪽에서 잡고 있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당시 책 읽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문예반에 들어가니, 글 쓰는 일도 쉽지 않았다. 6학년 선배들이 글짓기 대회에 나갈 때, 문예반 선생님은 우리도 함께 데리고 나가셨는데, 상은 나의 몫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날, 둘째 언니가 책을 선물해 주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나는 그 책이 얼마나 유명한 책인지도 몰랐고,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특별한 선물이어서 읽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6학년이 되었다. 나는 계속 문예반으로 동아리활동을 했다.


그런데 6학년이 되었을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집에서 책 한 권씩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유일하게 멀쩡한 책인 <어린 왕자>를 가져갔고, 선생님은 책장이 모여진 측면을 옆으로 기울이시고는 내 이름 석자를 그 책에 적어 주셨다. 그렇게 학급에 25권의 책이 모였다.


"선생님이 매일 숙제를 낼 거야. 그 숙제는 바로 매일 책 100쪽씩 읽어 오는 거란다."


선생님은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집에 있는 리코더 말고, 하모니카를 하나씩 준비하라고 하셨다. 그때 집에서도 하모니카를 사주셨는데, 유일하게 비싼 나만의 소유물이 되었다. 매일 얼마나 닦았던지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하모니카를 배우다 보니, 정확한 계이름을 몰라도 느낌대로 하모니카를 불다 보면, 내가 생각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때 소방차의 '그녀에게 전해주오.'도 불렀던 기억이 난다. 참 이상하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교사가 되고 나니, 그때 선생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모니카를 그렇게 쉽게 가르쳐 주셨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교사의 역량 가운데 가장 부러운 능력이기도 하다. 6학년 때 선생님은 그렇게 마음을 이끄는 분이셨다.


뭔지 모를 선생님의 마력에 이끌려 나는 매일 100쪽의 책을 읽어갔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의 대가는 그날의 청소를 빼주시는 것이었다. 책에 대한 내용을 말하지도 줄거리를 쓰지도 않았다.

"책 100쪽 읽어 온 사람?"

우리는 선생님의 질문에 왠지 모르게 진솔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지 않았던 애들은 매일 청소를 하더라도 선생님한테 진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사실 청소를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선생님이 내는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학생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책을 부지런히 읽다 보니, 하루에 100쪽이 아니라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학급 문고를 넘어서 동네에서 책이 많은 친구나 선배집의 책들까지도 읽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뒷집에는 4남매가 살았는데, 그나마 첫째 언니가 나에게 제일 친절했다. 그때 당시 언니와 함께 주산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인연 때문인지 그 언니는 나에게 동화책을 많이 빌려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책에 대해서 인심이 좋았던 건 바로 우리 반 반장이었다.

"우리 엄마가 이번에 책을 많이 사주셨어. 우리 집에 와서 책 빌려가."


난 그날 바로 우리 반 반장네 집으로 갔다. 그때 당시 나는 부반장이었고, 같은 동네였으며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반장도 책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점이다. 반장네 집은 뛰어서 가면 2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남자아이라서 집에 자주 가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냈던 친구라 그리 부담스러운 사이는 아니었다.


반장네 집에 가서 처음으로 빌려온 책은 '노인과 바다'였다. 그 이후로도 학교가 끝난 후에 반장네 집에 가서 책을 빌렸고, 난 반장네 엄마 덕분에 어린 시절 읽어야 할 세계 명작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9월 발령으로 우리를 떠나셨고, 한동안 선생님 없는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한 학기 동안 난 책 덕분에 많이 성숙해졌고, 그때 사춘기가 함께 왔다. 나는 점점 내성적으로 변했고, 책에 의존했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어 난, 여전히 문예반 활동을 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와 다른 점은 대회를 나갈 때마다 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서량이 늘어나면서 어휘력과 사고력도 함께 향상되었던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서 도서관에서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그래도 엄마는 인문계가 아닌 상업계로 진학해서 은행에 취직하기를 바라셨다. 그때 당시 친척의 보험을 들어주면서 집이 힘들었던 것도 있었지만, 엄마는 딸들에 대한 대학 진학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셨던 것 같다. 엄마는 오빠의 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두셨던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인문계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었고, 나름 중 3 때 상심했던 것 같다.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서, 500명 중에 전교 7등이라는 성적도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중 3 여름이 지나갈 무렵,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문예반 선생님은 수상자들을 불러 시상식에 부모님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학교에서 타는 마지막 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도 내 시상식에 첫째 언니와 언니의 지인과 함께 참석하셨다.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인문계 보내야죠."

언니의 지인이 엄마한테 말했고, 그날 엄마도 많은 고민 끝에 내게 인문계로 진학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대학 진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곤두박질친 성적을 가까스로 끌어올려, 인문계에 들어갔다.


나와 경쟁하던 아이들은 중3 때 이미 고등학교 영어와 수학 1학년 과정을 마치고 들어와 고등학교 1학년 때 성적은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대학은 못 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면서도 낙담하는 나를 보면서 둘째 언니는 그래도 대학에 간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사실 언니는 공부를 나보다 잘했지만, 대학에 가지 못했고 취직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언니 힘으로 결국 대학을 나왔지만, 그 시절 언니도 대학을 가지 못했던 일이 상처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언니는 사무직 일을 하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내 첫 등록금을 내주었다. 국립대여서 등록금은 사립대보다 비싸진 않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일에 대해 난 늘 감사했고, 큰 금액이 아니어도 조금씩 언니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고 노력했다.


수능을 보고 선생님은 사립대 사회대 쪽으로 진학을 권하셨지만, 등록금이 너무 비쌀 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 내 꿈은 방송작가였기에 국문학과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했던 시기였다. 결국 난 고집대로 국립대 국문학과로 원서를 썼지만, 기숙사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부모님은 자취비용까지 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셨고, 나는 국문학과를 포기하고,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대학교에 후기로 원서를 쓰려고 전화를 했다. 학과 상관없이 부모님의 근심을 줄여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시간이 저녁 6시 15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후기로 원서를 쓰려는 대학교에서는 전화한 그날 6시까지가 마감이어서 원서 접수가 안 된다고 했다. 그날 나는 낙심했지만, 그 일이 내 인생에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합격한 대학교 기숙사에서 한 명이 비었다며, 내가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의 전화를 주셨고, 나는 그렇게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도서관에 다니면서 학과 공부도 하고, 책도 읽었다. 그렇게 대학 1학년이 지나가고, 2학년이 되어 수강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정원 40명 중에 10등 안에 드는 사람은 교직 이수를 할 수 있다고 조교 선배의 말을 들었다.

"전 교직 이수 안 하려고요. 교직으로 생각이 없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신청해 둬. 나중에 취직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옆에 있던 선배가 말했다. 그 선배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그 선배의 말 한마디에 교직을 신청했다. 수업을 듣고, 교생 실습을 나가면서도 임용고시를 볼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지금 24년째 국어 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수업을 미리 다 들어서 기숙사 비용을 아끼고자 집으로 내려왔다. 교직 이수를 한 친구들은 서울 고시촌으로 올라갔지만, 나에겐 역시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독서실을 다녔다. 그곳에서 같은 시간에 밥을 먹던 한 언니가 있었는데, 컵라면으로 점심을 거의 때우는 듯했다. 나에겐 밥이 너무 많았기에 밥을 조금 나눠주면서 같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언니는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계속 준비 중이었다. 나는 국어교육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잘 몰랐던 시험 자료를 언니를 통해 받을 수 있었다. 한 번 임용고시를 보고 떨어진 이후, 방송작가로 2년 동안 활동하면서 시험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3번째 임용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만약, 문예반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약, 6학년 때 담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약, 반장이 책을 마음껏 빌려가라고 하지 않아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약, 글짓기 상을 타지 못해서 엄마가 시상식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언니의 지인이 함께 와서 엄마에게 인문계로 진학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엄마가 마음이 변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약,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언니가 첫 등록금을 내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만약, 후기로 진학할 집 근처의 대학에 조금 일찍 전화해서 원서를 접수했더라면,

내가 만약, 대학 선배가 도움이 될테니 교직 이수를 해두라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독서실에서 그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국어교사로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스쳐가듯 영향을 주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들이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