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 그리고 시어머님
21년 전 한글날 결혼을 하고, 다음 해 11월에 첫째를 낳았다. 결혼하고 도간 내신을 써서 지금 있는 이곳으로 이동했고, 첫째를 임신한 사실은 봄이 되어서야 알았다. 임신한 지, 두 달가량 지난 후였다. 속이 비면 입덧이 심해서 도시락을 싸가서 간식처럼 먹었다. 그리고 점심을 또 먹었다. 그렇게 하루에 다섯 끼를 먹었다. 체중은 아기를 낳을 무렵, 18킬로가 늘어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시아버님은 며느리 밥을 잘 챙겨 주라고 시어머니를 우리가 사는 집으로 보내셨다. 나는 시어머니가 불편하지 않았고, 다 챙겨주시는 게 너무 감사했다. 도간 전출로 왔을 때는 남편이 혼자 자취하던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아서 좁은 느낌은 있었지만, 그때 신혼집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남편 자취방에는 짐이 많지 않아서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신혼집은 남편과 나의 근무지 중간지역에 구했는데, 그곳은 친정이 있는 지역의 임대 아파트였다.
첫째를 낳고, 신혼집에서 가구며 다른 짐들을 옮겨와야 했다. 그런데 남편이 자취하는 곳은 너무 협소했고, 전세로 나온 집도 별로 없었다. 물론 매매는 있었겠지만, 우리에겐 너무 높은 벽처럼 느껴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학교 관사에 여유가 생겨 들어가게 되었는데, 남편이 있는 곳보다 크긴 했어도 신혼집에 있는 가구들을 들여놓는 정도는 되지 않았다. 결국 침대는 시댁으로 보내고, 장롱과 식탁, 그리고 그릇들만 가지고 왔다. 직장 생활하면서 알뜰히 모아 산 가구들이 흩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 그것들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짐을 다 정리하고 신혼집 전세금이 들어오기 일주일 전, 어머니가 그 전세금을 돌려주기를 원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첫째 아이를 돌봐주셨고, 우리는 매달 크진 않아도 어머님께 용돈을 드렸다.
"그 돈을 묶어 놨다가 나중에 집 살 때 보태려고요."
"나는 그 돈을 내가 묶어 두려고 했는데."
나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순간 어머니가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머니의 말씀은 진싱이었다. 결국, 어머님은 주말에 집으로 가신 후, 남편에게 전화를 하셨고, 남편이 중간에서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결국 그 돈을 어머니 계좌로 보내기로 했다.
주말에는 아버님한테 가셔서 밥을 챙겨주고, 일요일 저녁때쯤 어머니가 오셨는데, 나는 그전처럼 웃으면서 어머님을 맞이할 수 없어서 첫째의 옷을 화장실에서 손빨래하고 있었다. 그때의 내 마음은 폭풍이 치고, 불화살이 날아다녔던 것 같다.
다음 날, 내가 말을 잘 안 하고, 표정이 안 좋다고 생각하셨는지, 어머니는 첫째를 앉고 수유를 하던 내게 말씀하셨다.
"애기야, 무슨 일 있니?"
나는 그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 버렸다.
"어머니,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전셋집을 구해주셨다가 다시 돌려봤는 경우도 있나요? 그럼, 제가 산 가구도 결혼 후에 다시 반품해도 되는 건가요? 그리고 만약 돈을 돌려주기를 원하시더라도 저희가 섭섭하지 않게 말씀하시면 좋잖아요."
사실 그랬다. 난 내가 2년 동안 저축했던 것으로 부족했지만 내가 준비해야 했던 결혼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남편과 구한 전셋집도 내가 혼수준비를 한 그 금액만큼의 집으로 구했다. 양쪽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한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처음부터 전셋집이 없었더라도 난 그리 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불필요한 가구를 사지 않았을 테고, 그 돈으로 둘이 나중의 집을 위한 저축을 더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의 배경을 보고 결혼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그 시절, 부모님들이 해 주신 집은 다시 돌려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 고정관념이 그 시절의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난 후, 어머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첫째는 너무 어렸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그때 당시는 육아 휴직을 더 쓰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더욱이 휴직을 쓰면 관사를 비어줘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함께 지냈고, 속상한 마음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첫째를 생각하면서 무거운 마음을 털어냈다. 돈이야 벌면 되지만, 자식은 어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존재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불만스러운 마음을 남편에게 말할 수 있었지만, 남편은 나에 대한 미안함과 어머님이 자신에게 했던 속상함과 더불어 자식으로서 가지게 되는 안쓰러움으로 괴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수없이 마음을 다짐하고 털어내도 가끔 치솟아 오르는 속상한 마음은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운 감정도 서운한 감정도 희석되어 갔다. 결국 어머니는 7년 동안 주말과 방학을 제외한 시간들을 우리와 함께 지내셨다.
2년 후면, 내 나이도 어머니가 남편을 장가보냈던 그 나이가 된다. 그때 당시 아버님이 직장 생활을 하셨지만, 남편의 동생인 시동생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시기였기에 우리가 어머님께 용돈을 드려도 분명 부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님은 우리가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둘이 돈을 버니 집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의 노후가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님께 표출하지 못하고 가졌던 속상하고 서운했던 감정은 결국 어머니가 아닌 내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미움의 감정은 나 자신에게도 이롭지 못하며, 아까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이후, 첫째와 여섯 살 터울이 나는 둘째를 낳았고, 그때도 어머님이 몇 달 정도는 함께 돌봐 주셨고, 산후조리도 집에서 어머님이 해 주셨다. 그 이후, 나와 남편이 육아휴직을 번갈아 썼다. 수많은 순간들이 흘러 첫째는 21살이 되어 내년 군 입대를 앞두고 있고, 둘째는 중2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어머님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의 가치가 그 전셋값보다 몇 백배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님이 애써 키운 아들인 남편이 지금 내 옆에서 나를 많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꺼이 혼자 있는 외로움을 견디시면서 며느리 밥 해주라고 보내 주시고, 전세금 일 이후, 미안해하셨던 아버님의 마음을 생각해 볼 때, 난 그 이상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늘 한결같은 따스함으로 우리를 대해 주셨다. 한 번도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우리에게 주신 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만약, 그 시절 서운한 마음에 아이를 영아 어린이집에 보내고, 시댁과 소통하지 않았다면, 얼마 전 남편의 사촌형의 딸 결혼식에 어머님과 함께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며, 둘째 아이가 친척분께 용돈을 받고 자기도 모르게 번졌던 미소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며칠 전, 보내주셨던 맛있는 알타리무 김치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도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