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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1:00 – 스테로이드 약효가 나타나는 시

by 이생

연일 이어지는 폭염으로 휴대폰에 폭염 경고 문자가 계속 이어진다. 오히려 이런 날씨에 뜨겁게 달구어진 흙을 밟고 있으면 발바닥이 편안하다. 때로는 뜨겁게 달구어진 돌을 밟다가 흙을 밟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돌을 밟으면 숯가마의 열기처럼 발바닥으로 열기가 퍼진다. 그러다가 너무 뜨겁다 싶으면 흙을 밟으며 걷는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등 쪽으로 땀이 흐른다. 자외선은 좋지 않기 때문에 우산을 쓰고 걷는다. 우산은 비가 올 때만 쓰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우산만큼 처음의 디자인이 변하지 않는 물건은 없을 것 같다.


폭염으로 날씨가 덥지만, 관절염 환자인 나는 추위보다는 오히려 따뜻한 날씨가 편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곳이 불편해서 꼭 얇은 점퍼를 챙겨 다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맨발 걷기도 하지만, 점심을 먹은 후에도 30분 정도 맨발 걷기를 한다. 물론 걷다가 앉기를 반복하지만.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가면 오후 1시쯤 된다. 이 시간이 되면 약을 먹은 지 4~5시간 정도 흐른 시간이 되어 손가락 통증과 부기도 사라지고 턱관절도 편안해지고 발바닥도 부드러워진다.


류마티스를 앓기 전의 나로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다. 아침이면 불편한 몸 때문에 불편한 감정과 슬픈 감정이 함께 올라온다면, 오후 1시가 되어 약효가 나타나면 다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저녁 시간이 되면 더욱 편안해진다. 정말 낮과 밤이 다른 내가 되어 버린 기분이다.


사실 오후 1시가 되기 전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움직이면 통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통증이 잦아들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하다. 소파에 몸을 기대서 눈을 감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암 투병 중이신 인생의 선배님이다. 어제는 폭염과 항암 치료 후유증으로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그 힘겨움을 부여잡고 어제저녁 맨발걷기 하는 산을 걷고 있는데 산토끼가 앙증맞게 앉아 있어서 사진을 찍으셨다면서 사진 한 장을 보내셨다.

다람쥐는 많이 봤어도 산토끼는 처음이다. 분명 맨발걷기 중 산토끼를 발견했을 때, 통증을 잊고 그 귀여움에 마음을 빼앗기셨을 것이다. 인생의 신기루같이 토끼가 아마도 그 선배님을 위로하고자 그 길 한가운데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은 요즘 마음의 위로가 되는 음악이라며 유튜브 동영상을 보내셨는데 파바로티의 음악이었다. 눈을 감고 그 음악을 감상했다. 힘겨운 선배님과 함께 이 시간을 견디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픈 영혼이 치유 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부디 이 음악이 그 선배님의 마음도 치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발걷기를 하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면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보다가 나만 이렇게 도태되어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한 생각이 들고, 이렇게 평생 힘겹게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답답함이 밀려올 때가 많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생은 우리에게 언제나 완벽한 삶을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공부를 완벽히 끝낸 다음에 시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삶은 우리에게 어느 날 어려운 시험 문제를 내민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이 나에게 어려운 시험지를 꺼내기 전에 틈틈이 그 삶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공부를 다 하고 시험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공부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즐거움을 뒤로 한 채. 그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즐거운 무언가를 찾아 즐기고 싶지만 막연하게만 느껴진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들을 해나가야 한다.

오늘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남편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자기야, 우리 나중에 유럽 가서 몇 달 살아보자.”

남편은 나를 보고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고 보니, 또 ‘나중에’였다.


사실 오늘 아침에 읽었던 책에서 작가가 자신이 버킷리스트에 포함시켰던 내용이다. 그런데 나도 한 번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그리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지금은 몸이 불편하니, 몸을 잘 회복하고 아이들이 조금 더 자란 후에 한 번 실현해 보고 싶다. 지금은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을 나 자신 스스로 그리고 가족과 함께 해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선배님의 눈앞에 나왔던 산토끼처럼 내 인생에 즐거운 신기루 같은 일들을 하나씩 채워나가야겠다.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아이들과 남편에게도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들로 삶을 채워나갈 수 있도록 함께 응원해 줘야겠다.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소소한 행복을 찾아 남은 오늘도 노력해 봐야겠다. 오후 1시가 지나면 원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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