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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n 27. 2022

첫판부터 장난질이냐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1일째

6월 24일 금요일 흐림


오늘은 육아휴직 첫째 날. 드디어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 어젯밤 아내와 축하파티로 닭발과 야식을 먹고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잤다. 출근 안 한다고 새벽까지 놀다가 늦잠 자지 말자고 서로 다짐하면서.


그래도 명색이 10년 차 직장인이다. 7시 반에 일어나 9시까지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해왔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몸이 기억한다.



"엄~마!"


첫째(둘째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편의상 첫째라고 쓰기로 하자)가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나보다 조금 더 눈을 뜬 아내가 뒤척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여보! 큰일 났어 9시야!"


헐. 셋 다 그렇게 늦잠을 잤다고? 뭐 어때. 오늘부터 출근 안 하는데. ㅋㅋ

아 그게 문제가 아니다. 9시 5분에 유치원 버스가 오는데...!

퀵실버가 도와줘도 우린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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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가훈은 "포기하면 시합 종료"

슬램덩크 안 선생님의 그 명대사 맞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살자는 의미로 내가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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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고 일단 준비를 서둘렀다. 유치원에 갈 방법은 생각해보니 두 가지가 더 있었다.

직접 데려다 주기 (유치원은 자전거 타면 10분 정도 거리다)

그리고...9시 25분차 타기...! (우리 아파트에는 유치원 차가 두 번 온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빠르게 역할분담을 했다. 내가 아침을 대충 먹이는 동안 아내가 먼저 씻고, 아내가 아이 세수와 양치질을 시키는 동안 나도 대충 나갈 준비를 했다. 20분 만에 등원 준비 완료!


아이 손을 잡고 후다다닥 달려가니 이미 유치원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이미 첫째는 3월부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내가 직접 아이를 등원시킨 날이다. 2월까지는 회사가 재택근무를 병행해서 나도 어린이집은 꽤 등하원을 시켰었는데, 공교롭게도 유치원에 입학하는 3월부터 회사가 매일 출근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어쨌든 늦을뻔했지만 무사히 등원시켰고, 실감이 났다.


나는 오늘부터 육아휴직하는 아빠다!


스스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육아휴직을 해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일과를 짜서 알차게 보내자고 다짐했건만. 늦잠이라니. 어이. 이 인간아. 첫판부터 장난질이냐?


아침부터 충격과 반성을 거친 탓에 그 이후의 하루는 깨알같이 충실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내가 지인들에게 허준이라고 칭송하는 동네 한의원에 오랜만에 들러 골병이 든 목 허리를 치유했다. 유튜브(나는 건강을 주제로 유튜브를 운영 중이다. 아직 구독자 6천명짜리 하꼬지만.) 영상을 만들고, 오후에는 병원(지난주 첫째를 데려갔던)에 가서 진료비 세부내역서를 떼왔고, 백화점에 들러서 아내가 받은 출산 축하 선물 중 하나를 교환했다.


4시 반에 유치원 버스가 아이를 다시 아파트로 데려다준다. 하원한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 있다 보니 아직은 어색함이 느껴졌다. 말로만 듣던 아이 친구들과 그 부모들의 실물을 보며 적응의 시간을 가졌다. 이젠 이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친하게 지내려면 내가 더 노력해야겠다. 다음 주엔 아이들과 더 잘 놀아줄 수 있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어보자.


저녁시간은 평소와 같았다. 퇴근 후의 귀가시간은 보통 7시 전후.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이 시간까지는 결코 짧지 않았다. 내가 회사에 있는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구나. 다시없을 기회이자 소중한 하루하루.


그 첫날이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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