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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Sep 04. 2022

언어의 온도, 가족의 주말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73일째

9월 4일(일) 비


일요일이다. 휴직 후 주말이 무서워졌다. 두 아이와 남편, 온 가족이 함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가족인데 가족끼리 함께 있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싶을 만큼 주말의 우리는 예민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 1.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면 듣고 반응을 해야 하는데 첫째 아이는 들어도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열심히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그러다 보니 "들었어?"라며 윽박을 질러야 할 때가 많았다.


이유 2.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우리 첫째는 물을 먹고 싶으면 "왜 물 안 줘?"라고 말했다. 물이 필요하면 그냥 달라고 하면 될 일이지 "왜 물 안 줘?"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것도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불만 섞인 말투로 온갖 짜증을 다 섞어 말했다.


첫째의 이런 반응들은 우릴 화나게 했고 우리의 화는 첫째를 더욱더 예민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굴레였다. 남편과 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치원 담임선생님과 첫째에 대해 상담을 했고, 기질적인 부분, 사회생활을 할 때 고쳐야 할 점 등 현상 파악을 정확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첫째의 육아에 있어 아이가 혼란을 느끼거나 불안을 느낄 만한 요소를 찾아 제거했다. 좀 더 심플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기상 -> 등원 -> 하원 -> 놀이터 -> 저녁식사 -> 취침의 과정에서 함께 하는 주양육자를 매일 통일했고 가능한 한 정해진 시간 안에 진행되도록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잘한 것들에 있어 아이 말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유도신문이나 사소한 일에서 아이를 나에게 굴복시키는 커뮤니케이션을 안 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기다림은 필수였다. 아이에겐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본인이 뭔가를 제안했을 때 그 제안을 엄마나 아빠가 받아들여주기를 원했다.


하루, 이틀, 사흘... 아이가 변하는 데에는 3일이면 충분했다. 감기나 장염 같은, 아이의 질환이 나아지기도 했지만 아이의 말투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방금 재우고 나온 아이는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불을 끈 후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상황, 첫째는 내가 오늘 저녁 붙여준 "스스로 척척 칭찬 스티커" 판을 보고 싶어 해다. 첫째는 "엄마, 미안한데 잠깐 불을 켜고 스티커를 보면 안될까?"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예전처럼 자기 싫다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감동했지만 벅찬 마음을 숨기고 "그래"라고 말한 뒤 불을 켜주었다.


잠깐 나와 동네 마실을 다녀올 때 문방구에서 산 색칠놀이 공책을 너무 하고 싶었는지 "엄마, 집에 가서 손만 씻고 샤워하기 전에 그 책 해도 돼?"라고 묻길래 "그래"라고 답해주니 "와! 신난다!"라고 반응했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와 상호작용이 가능해진 것이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다.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짜증 내거나 울지 않은 첫째를 보며 <금쪽같은 내 새끼>가 떠올랐다. 많은 금쪽이는 부모에 의해 길러진다. 금쪽 처방 후 달라진 금쪽이 처럼 우리 첫째가 달라졌다. '언어의 온도'가 이렇게 중요하다. 우리가 바뀌었더니 우리 첫째도 금방 변했다. 그리고 나와 남편도 달라졌다.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투와 행동을 첫째가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바뀐 우리들의 오늘 주말은 아주 평온했고 행복했다. 이 행복과 평화가 오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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