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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Sep 17. 2022

우리 집 효녀를 소개합니다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86일째

9월 17일 토요일 맑음


우리 집에는 효녀가 살고 있다. 우리 둘째다.


우리 효녀의 효도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됐다. 일단 임신 기간인 약 280일간 그 흔한 출산 전 긴급 산부인과 방문 이벤트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워킹맘인 아내가 일과 육아로 바빠서 영양 만점 식사를 매일 챙겨 먹지 못해도, 벌려놓은 일이 많은 아빠가 첫째 때만큼 매일 태담을 해주지 않아도 쑥쑥 잘 자라주었다. 둘째는 원래 임신 6~7개월까지는 머리가 위에 있는 역아였다. 출산 시에도 이렇게 있으면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 그런데 엄마가 태아가 돌아가게 해 준다는 고양이 자세를 틈틈이 했더니 다음 검진 때는 바로 돌아가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효심으로 엄마를 감동시킨 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날이었다. 일단 둘째는 너무 커지면 나갈 때 엄마가 힘들까 봐 막달에도 몸무게가 많이 늘지 않았다. 예정일이 다가와도 가진통이 없어서 유도분만을 했는데, 아침 8시에 이제 나가야 한다는 걸 알았는지 진통이 시작됐다. 그리고는 열심히 나올 준비를 하다가 엄마가 무통을 맞자마자 10시부터 힘을 내줘서 우리 아내는 유도제 투여 후 약 3시간 만에 무통 자연분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몸무게는 2.7kg로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우라'는 격언을 엄마 아빠가 실천할 수 있게 해 줬다.


신생아실과 조리원을 거쳐 집으로 온 뒤에도 효도의 연속이었다. 영아산통으로 고생한 처음 몇 주를 제외하고는 크게 악을 쓰며 우는 적이 없다. 모유도 열심히 잘 먹었고 분유도 맛있게 늘 잘 먹었다. 모유를 끊어도 분유를 두 번 바꿔도 딱히 거부반응이 없었고 응가도 항상 잘하고 있다. 예방접종 맞은 날에 미열이 살짝 올라온 것을 제외하면 항상 건강하다. 배꼽이 살짝 아직 튀어나와 있고 얼굴에 신생아 여드름이 약간 남아있지만 거의 괜찮아졌고 다른 곳은 매끈하다. 방금 나열한 것은 원래 빈번하게 아기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들이다.


아직 말은 못 하지만 아마 똑똑한 것 같다. 오빠에게 감기를 살짝 옮아서 콧물이 나길래 내가 집에 있던 코를 빼주는 기구로 코를 뚫어준 적이 있다. 처음엔 엄청 싫어하며 울었다. 그런데 그걸 하면 코 막힌 걸 빼주는 거고 하고 나면 편해진다는 걸 알았는지 그 뒤로는 콧구멍에 기구를 넣어도 울지 않고 얌전해졌다.


50일 촬영 날에는 엎드려 있는 ‘터미 타임’ 자세를 잘 해낸 건 물론이고 총명탕 한 사발 드링킹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뚫어져라 쳐다봐서 포토그래퍼에게 아이를 너무 잘 키우셨다는 칭찬도 듣게 해 주었다. 딱히 우리가 뭘 잘해줘서 얘가 눈빛과 표정이 또렷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요즘엔 또 대단한 효도를 하고 있는데 바로 잠이다. 우리 둘째는 어젯밤 9시에 밤잠을 자기 시작했다. 끙끙대는 소리에 눈을 떠서 핸드폰을 확인하니까 무려 아침 6시다. 무려 9시간을 잔 것이다! 첫째가 처음으로 통잠을 잔 날이 123일째였는데, 어제 둘째는 74일째였다. 물론 첫째의 통잠은 밤에 더 길게 10시간 이상을 자고 아침 8시에 일어났던 것이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훨씬 빠른 페이스다. 


물론 하루만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수는 있다. 그치만 그건 아닐 것 같(다고 믿고 싶)다. 그저께도 중간에 아내가 한번 깨서 쪽쪽이를 물려주긴 했어도 거의 8시간을 잤다. 그리고 어제도 사실 기저귀가 좀 새고 방이 너무 더워서 불편하지 않았다면 더 잘 수도 있었다. 배고파서 깨서 울어서 간 게 아니었다. 아무튼 이러쿵저러쿵할 필요 없이 얘는 효녀니까 오늘도 아마 잘 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와 아내는 새벽 수유를 안 하게 되어도 매일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새벽에 안 깨는 만큼 더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거의 새벽까지 핸드폰을 하고 유튜브를 보느라 늦게 자서 그렇다는 게 문제다. 우리 집 효녀가 부모님의 숙면을 위해 저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그 지극한 효심을 허투루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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