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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Sep 20. 2022

5세의 기회비용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89일째

9월20일(화) 청명한 가을 날씨


요즘따라 첫째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어졌다. 잠자는 게 세상에서 제일 아쉬운 우리 첫째는 원래 10시에서 10시 30분쯤에 잠에 들었다. 유치원에 들어가 낮잠을 자지 않음에도 시간이 잘 당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둘째가 태어나며 9시까지 당겨졌다. 남편과 철저한 분업 하에 나 첫째, 남편 둘째 2인 1조로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물론 노느라 더 늦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보통 10시 전에는 잠에 들었다.


할 게 너무 많아서 그렇다. 우리 첫째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유치원에서 보낸다.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시간은 오후 4시 30분. 그 뒤론 1시간 30분 정도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논다. 그 뒤 귀가하여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는다. 저녁 먹기 전 유튜브를 보기도 한다. 저녁식사 클리어 뒤엔 자유놀이 시간이다. 그림 그리기를 하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양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뒤 잠에 든다.


자유놀이 시간은 '자유놀이'지만 첫째가 어느 정도 큰 뒤부턴 뭔가를 준비해 주길 기대한다. 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 재료라던가, 엄마표 과학실험, 엄마표 만들기 등이다. 종이 그릇으로 로보카 폴리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을 그리기 시작했더니 브룸스타운 전체를 다 만들 뻔했다. 색종이를 가위로 잘라하는 대칭 놀이도 재밌어하더니 일주일 내내 그것만 한 적도 있다. 아무것도 없을 땐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그 전엔 몇 개월 정도 넘버블럭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는데 지겨워진 뒤엔 새로운 놀이 자극을 찾는다.


"안녕? 난 누구야, 넌 누구니?~ 이런 놀이는 이제 재미가 없어."


며칠 전 첫째가 한 말이다. 장난감으로 역할놀이하는 게 재미없다는 얘기다. 그럼 뭘 해줘야 할까? 매일매일 새로운 놀이 자극을 추구하는 첫째에게 가장 좋은 또 하나의 놀잇감은 새로운 지적 자극이다. 한글, 영어, 숫자 모두 놀이처럼 떼었던 첫째는 요새는 수와 연산 놀이를 좋아했다. 덧셈과 뺄셈 같은 간단한 연산 퀴즈를 포스트잇에 적어주는 퀴즈를 서로 내주는 것이다. 첫째가 나에게 문제를 내면 내가 풀고, 또 내가 문제를 내면 첫째가 푼다. 모르는 건 패스다. 그냥 아는 것 위주로 대충대충 푸는 놀이를 재밌게 했고, 다만 첫째가 나에게 어려운 문제를 내면 내가 풀이할 때 어떻게 하는 지를 물어본다. 그럼 알려주었다.


그런 첫째에게 최근에 새로운 놀잇감이 생겼다. 스마트 기기로 국어, 영어, 수학을 하는 학습지 무료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첫째 친구가 하길래 그 엄마와 이야기하다 알게 되었다. 무료체험만 해도 사은품을 주길래 신청했고, 기기와 종이 학습지들이 배달되었다. 첫째는 기기가 배달된 그날 흥분을 멈추지 못했다. 신나게 국어, 영어, 수학을 했다. 종이 학습지도 한 번에 여러 장을 해치웠다. 하고 싶다길래 말리지 않았다. 사실 말려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도 스마트폰이 생겼다'며 좋아하는 첫째의 저녁시간이 요 며칠 훌쩍 지나버렸고 무료체험 나흘째인 오늘 첫째는 10시가 넘어 잠에 들었다.


수면시간이 늦어지는 것, 즉 유치원 하원 후의 일상에서 이 학습 기기가 차지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진 것이 찝찝했다. 또한 시력이 안 좋은 첫째가 너무 스마트 기기를 오래 만지는 게 불편했다. 무료체험 기간이 끝나면 이 기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것을 첫째에게 조심스레 말했지만 "그럼 매일 조금만 하면 되잖아?"라며 난색을 표하길래 고민하는 중이다.


첫째의 책 읽는 시간, 자유시간이 없어지는 것도 고민이다. 어젯밤만 해도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장난감 놀이를 하겠다며 알람을 맞춰달라고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아침엔 책을 읽고 싶다며 식탁에서 책을 읽다가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아 나에게 호되게 혼났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다 보니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첫째의 자유의지로 '오늘은 뭐 할까?'를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졌기에 매일 아쉬운 마음을 가득 품고 잠에 드는 것 같다.


무료체험 기간은 이번 주 금요일까지고, 등록 여부는 목요일까지 결정해 담당 선생님께 알려주기로 했다. 이 기기가 사라지면 첫째가 많이 아쉬워하겠지만 남편과 나의 마음은 어느 정도 기기를 반납하는 쪽으로 기운 것 같다. 첫째의 시간과 우리의 돈의 기회비용은 소중하다. 이 기기를 반납하면 첫째의 자유시간이 확보된다. 우리의 돈도 굳는다. 우리 첫째의 5세 가을은 소중하니까. 이 가을에 무엇을 담을지 엄마는 또 고민이다만 니 마음대로 하라고 맡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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