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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Sep 24. 2022

남편들이여 요리를 해보세요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93일째

9월 24일 토요일 쾌청


무난한 하루였다. 저녁식사 시간 전까지는.


오늘 아침에 나는 둘째의 아침잠에 편승해 10시도 넘어서 일어났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토요일 아침에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다. 아내는 첫째를 데리고 토요일마다 가는 영어놀이센터 '잉글리시 에그' 수업에 다녀와서는 오늘은 날씨가 끝내주니까 반드시 밖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집에서 갈 수 있는 한강 공원 중에서 가장 한적한 곳으로 갔는데 다행히 눈치게임 성공이었다. 이 좋은 가을날인데 생각보다는 사람이 적어서 주차도 금방 하고 공원에서 돗자리와 캠핑의자를 세팅할 좋은 자리도 차지할 수 있었다. 한강 공원에서 첫째는 아내와 같이 킥보드를 타고 다니며 놀았고, 나는 둘째를 데리고 우리 자리를 지켰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둘째를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띠는 것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집에 도착해서 아내는 저녁 준비를 하고 나는 애들을 돌봤다. 사실 원래 우리 집의 역할 분담은 평소에는 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애들이 엄마를 더 찾아서 그런 면도 있긴 하지만 내가 요리를 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기간 자취를 했던 짬밥을 바탕으로 결혼 초기부터 요리를 주로 담당해왔다. 원래는 쉬운 파스타나 찌개 같은 것밖에 할 줄 몰랐지만 요리 담당을 하게 되면서 백종원의 유튜브나 '만개의 레시피'앱을 보면서 따라 했더니 점점 요리 스킬과 할 수 있는 메뉴가 늘어났다. 아내가 맛있게 먹어주니 자신감도 붙어서 전에는 장모님 생신에 내가 미역국을 끓여드리기도 했고, 장인어른 혼자 계신 날에 찾아가서 콩나물 불고기를 해드린 적도 있었다. 바빠서 밀키트를 자주 이용하게 되더라도 집에서 밀키트를 조리하는 역할을 주로 내가 해왔다.


사실 이건 부부가 같이 육아휴직을 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다. 실제로 내가 같이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면 아내에게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힘드시지 않아요?"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에둘러서 말하지만 결국 남편이 집에서 삼시세끼 다 먹는 '삼식이'가 되면 힘들 거라는 게 그들의 심리인 것 같다. 내가 만약 요리를 손도 못 대는 사람이라면 아마 아내도 같이 휴직하는 걸 더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집안일=가끔 도와주는 것, 요리=아내가 하면 먹기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을 둔 사람은 내가 요리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상상 속의 동물 보듯이 신기하게 나를 쳐다본다. 그런데 이번에 휴직을 하면서 아내가 전보다 요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애들과 집안일 상황이나 메뉴에 따라 요리 담당이 달라지게 됐다.


우리 집 요리 담당에 대한 배경 설명은 이쯤 하고, 어쨌든 오늘 저녁은 첫째가 갑자기 카레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아내가 자기가 카레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집에 재료는 다 있었다. 고형분인 버몬트 카레와 고기, 감자, 당근, 양파까지. 그런데 집에 온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카레는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첫째가 숨은 그림 찾기 놀이와 30분짜리 유튜브 시청을 끝내고 둘째가 목욕을 마칠 때까지도 냄비에는 카레가 되고 싶지만 아직 되지 못한 무언가가 끓고만 있었다.


거의 한 시간 반이 되어서야 아내가 밥을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식탁에는 여전히 카레가 되지 못한 무언가(?)를 밥에 부어놓은 음식이 놓여 있었다. 첫째는 갑자기 카레 말고 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말했고 아내와 나는 카레의 레시피를 놓고 말싸움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그 타이밍에 둘째가 분유를 먹을 시간이 되어서 아내는 젖병을 들고 안방에 들어간 사이 나는 카레가 되려고 했지만 끝내 되지 못한 그것에게 심폐소생술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아내가 만든 것도 카레가 될 조건은 다 갖췄다. 카레를 포함해 재료도 다 들어갔고 충분히 끓여서 잘 익은 상태였다. 다만 카레처럼 걸쭉하지가 않았고 너무 싱거웠을 뿐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는 물이 너무 많거나, 물과 야채에 비해 카레가 너무 적었거나, 더 졸여야 하는데 아직 묽을 때 담았거나 셋 중 하나였다. 문제는 이미 그 상태로 밥에 다 부어져 있어서 그 상태로 다시 끓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카레도 이미 다 써버렸다.


'냉동실의 강황 가루를 써보자...!'


이 강황가루로 말할 것 같으면 약 3년 전에 장인어른이 강황가루가 기억력 향상에 좋다면서 아내에게 퍼먹으라고 갖다 둔 것이었다. 아내는 한입도 먹지 않아서 그대로 냉동실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강황가루는 바로 카레를 만드는 원료다. 강황가루를 넣고 저으며 끓이자 카레가 노란 색깔이 살아나면서 다시 맥박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좀 더 끓이니까 밥이 뭉개져서 약간 죽처럼 되긴 했어도 맛은 충분한 카레밥이 됐다.


첫째가 호호 불어먹고 나도 뿌듯한 마음으로 밥을 먹고 있는 사이 아내가 둘째에게 분유를 다 먹이고 식탁으로 왔다. 내가 살려낸 카레를 먹어보더니 어떻게 한 거냐고 놀란다. 그제야 자기가 만들면서도 이 카레는 망했고 너무 맛이 없는데 어떡하나 걱정했다고 털어놓는다. 내가 냉동실에 있던 강황가루를 넣고 다시 끓였다니까 나더러 '요리왕 비룡'이냔다. 첫째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다가 맛이 없지 않고 맛이 있다고 정정해주었다.


혹시 휴직을 하거나 은퇴를 하려는 남편들이 주변에 있다면 꼭 요리를 배워두라고 권하고 싶다.

삼식이 소리 듣지 말고 직접 요리를 해보세요. 몇 번 해보면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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