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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Oct 02. 2022

아들과의 트래킹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100일째

*어제의 일기 


10월 1일(토) 미먼 많은 맑은 날 


아들과 영어 센터에 다녀오는 날이다. 오늘 하루도 2인 식구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들에게 피크닉을 제안했다. 동네의 아차산에 가자는 것이었다. 동네지만 산기슭 산책 데크까지 가자면 시간이 꽤 걸린다. 힘들어서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흔쾌히 승낙하여 솔직히 놀랐다. 


밥을 먹고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출발했다. 네이버 지도에서 도보로 25분이라고 나와 있었다. 데크길 시작점까지 25분이니 데크길까지 걸으면 왕복 1시간이 넘게 걸어 다녀야 하는데 괜찮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바깥활동으로 아이의 몸과 마음을 환기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최근 우리 가족은 아들 때문에 힘들었다. 본인도 힘들었을 거다. 엄마, 아빠의 연이은 훈육들은 어느 순간 도를 지나치기도 해서 아이 마음에 상처가 됐을 거다. 우리 역시 아들의 생트집과 산만함에 지쳐갔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혼난 게 벌써 일주일여가 됐을까. 유치원 선생님 말을 들으니 유치원에서도 정도가 주의력이 부족해 계속 지적을 받아왔던 것 같은데, 아이는 아마 하루 종일 집과 유치원에서 훈육을 들어왔을 것 같다. 


오늘 하루쯤은 정해진 규율이나 데드라인은 없이 아들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 물론 자연과 산을 벗 삼아 말이다. 물론 아이가 꽂혀있는 것은 나무와 데크길의 숫자들이다. 숫자를 확인하며 걷느라 자기도 모르는 새에 계속 산에 오르고 길을 걷는 것이다. 


그 모습이 조금 걱정돼서 아이에게 염려가 된다고 말을 하기도 했다. 


"산에 왔으니 우리 나무를 보고, 거미를 보자. 숫자만 계속 보려고 하니까 엄마는 조금 걱정이 돼."

"그래? 넘버블럭스 그런거땜에?" 


아이가 내 말을 듣고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마음 깊이 숫자를 보고 싶어 했다. 내 마음처럼 아이가 나무와 벌레와 꽃을 보면 좋겠지만 그것조차 내 욕심일 테니 그저 아이 마음대로 하게끔 했다. 


그리고 내려와서 먹고 싶었던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 동네 버스를 타고 집까지 왔다. 동네에서 마침 동갑내기 친구들을 만나서 신나게 한 시간여를 또 뛰어다니며 놀았다. 


오늘 아이는 단 한 번도 힘들다고 주저앉거나 안아달라 업어달라 보채지 않았다. 그저 자기 내키는 대로 생각하고 걷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의 마음과 내 마음이 어느새 조금은 가벼워져 있는 것 같았다. 


저녁에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아이가 숫자를 좋아하는 것까지 탐탁치 않는 것은 너무 심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건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우리가 보는 시선에 따라 아이는 문제아도 될테니 우리가 좀 더 아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남편 말이 맞는 것 같다. 


조금 걷다 툭하면 바닥에 주저앉으려고 했던 몇 달 전이 떠올랐다. 그때도 몇 번 주의를 줬는데 우리도 모르는 새 아이는 더 이상 바닥에 주저앉지 않고 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아이만 참을성이 부족한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우리가 틀렸다. 아이는 계속 자란다. 크고 있다. 우리가 아이를 틀 안에 가두고 계속 혼내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아이를 좀 더 믿기로 했다. 그 아이의 존재 그 자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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