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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Oct 03. 2022

아들내미 관찰일기 (2)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102일째

10월 3일 월요일 오늘 강릉은 하루 종일 흐림


오늘 아내와 나는 첫째만 데리고 기차로 당일치기 강릉여행을 다녀왔다. 둘째는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절반씩 나누어서 봐주셨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 역시 하루 종일 아들을 관찰한 내용을 일기로 써보려고 한다.


08:00 자다가 엉겁결에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셔서 반가워할 새도 없이 어른들 넷이서 기차를 놓치면 안 되니까 서두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협조적으로 준비에 임해서인지 원래 계획했던 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출발할 수 있었다. 다만 어제 자기 가방에 갖고 갈 물건을 넣으라고 했더니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놨던 것을 엄마 아빠가 다 빼고 필요한 것만 가져가라고 해서 크게 좌절하긴 했다.


09:00 일찍 도착해서 여유롭게 기차를 기다렸다. 약간 너무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그 사이에 역에 다른 기차나 지하철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더니 기대감이 커지는 눈치다. 서울은 우리가 출발해서 기차를 탈 때까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탑승하는 곳에서 왜 이렇게 안 오냐고 10번쯤 물어보다가 9시 30분쯤 기차에 올랐다.


11:00 강릉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창가 자리에 앉고 옆에는 엄마가, 앞에는 아빠가 앉았다. 우리가 예매를 할 때부터 얘가 앞 좌석을 발로 찰게 뻔하니 아예 이렇게 세팅을 한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서 창밖을 구경하거나 챙겨 온 미로 찾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엄마한테 5분에 한 번씩 혼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는 아빠랑 통로를 오가며 기차 다른 칸 구경을 다녔다. 화장실과 자판기를 특히 좋아했는데 보리차를 사려고 했더니 자판기가 고장이라 음료가 안 나와서 실망했다.


11:30 강릉의 안목해변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본 바다에 신이 나서 해변을 뛰어다녔다. 서울은 춥고 비가 왔었으니 강릉도 그럴까 봐 걱정했는데 비는 완전히 그치고 날씨도 점점 좋아졌다. 다만 양말에 운동화를 신고 와서 모래가 계속 들어가서 점점 불편해했다. 아빠처럼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어야 했는데 실수다. 아빠와 낄낄대며 파도로부터 도망치기 놀이를 하다가 바닷물이 덮쳐서 바지까지 다 젖었다.


12:30 미리 찾아둔 해변가 피자가게에서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와 피자를 열심히 먹었다. 평소에 먹던 피자보다 훨씬 두껍고 모든 메뉴가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이 심히 느끼하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이런 걸 매일 먹게 하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이런 특별한 날에 한 번쯤은 괜찮겠지. 그래도 먹성은 살아있어서 어제에 이어서 자기에게 할당된 분량은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14:00 밥 먹고 해변을 산책해 소화를 좀 시키다가 ‘브릭 캠퍼스’라는 곳에 갔다. 강릉 날씨가 안 좋으면 가려고 찾아둔 실내 시설이다. 레고로 만든 다양한 작품을 전시하고 직접 만들어볼 수 있게 해 놓은 일종의 미니 레고랜드 같은 곳이었다. 어른이 보기에 그닥 대단할 것은 별로 없었지만 얘는 꽤나 주의 깊게 전시 관람을 했고 직접 만드는 부스에서는 자동차도 멋지게 만들어냈다. 막판에 나올 때는 아쉬움에 안 나가고 싶어 했지만 직접 만든 블록을 스캔해 나비로 화면에 소환하는 것을 딱 2번 더 해보고 제 발로 나왔다.


16:00 한참 해변을 걷다가 지칠 무렵 주요 해변을 고루 다니는 마을버스에 탑승했다. 이런 게 있는 줄 미리 알아본 게 아니었는데 운이 좋았다. 그런데 자리가 없고 서서 타고 있어야 하니까 기분이 안 좋고 불안해했다. 사실 나는 5살이면 노인 못지않은 교통 약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서 아빠에게 의지를 하고 있는데 그걸 본 어떤 아주머니가 양보를 해줘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만 버스에서 한 행동이 조금은 버릇이 없었던지라 엄마의 눈밖에 나서 내려서 크게 혼나고 말았남. 아빠와 엄마의 생각이 달라 언성이 조금 높아지니까 눈치를 보면서 따라다녔다.


18:00 한바탕 안 좋아졌던 분위기가 화해무드로 풀릴 때쯤 해질녘 강문해변에 도착했다. 이 와중에 뭐가 먹고 싶냐니까 고기란다. 부모님께 난생처음 바닷가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나 보다. 열심히 먹다가 배가 불러지자 엄마 아빠 둘만의 시간을 주고 야외 테이블에서 혼자 음악 감상 시간을 가졌다.


20:30 서울로 가는 기차에 탑승했다. 하루 종일 잔소리(라고 하기 싫지만 솔직히 잔소리였다)를 들은 효과인지 그냥 피곤해서인지 아침보다 훨씬 얌전해지고 말하기 데시벨도 훨씬 낮아졌다. 엄마 아빠는 쓰러질 듯 피곤한데 얘는 멀쩡한 걸 보면 분명 체력 하나는 어른 못지않다. 하지만 역에서 집에 가는 차에서는 방전이 된 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빠에게 어깨에 축 늘어져서 침대로 골인.


사실 아내는 하루 종일 얘가 ADHD인가 아닌가를 판독하기 위해 파견을 나온 사람처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우리 첫째는 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산만하고 어딘가 자꾸 정신이 팔려서 불필요한 이상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이나 대인관계와 학습 능력 등 여러 가지를 보면 그렇게 정신적으로 아픈 애라고 할 정도는 분명 아니다. 나도 유튜브에서 아들들 행동 관련한 콘텐츠를 좀 찾아보니까 평균치에서 그닥 많이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제점이 있더라도 일단 어제보다 나아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애는 어른의 기준에 맞게 행동할 수는 없다. 애는 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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