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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Oct 02. 2022

아들내미 관찰일기 (1)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101일째

10월 2일 일요일 흐리고 비가 올락 말락


오늘은 우리 아들과 내가 단둘이 긴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내일은 둘째를 맡기고 셋이서 기차여행이 예정되어 있기에 오늘과 내일의 일기는 우리 첫째인 5살 아들내미를 관찰한 내용으로 기록해보려 한다.


08:20 어제 휴직 100일 기념 파티를 하고 새벽에 잔 엄마 아빠보다 먼저 일어났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엄마를 부르는데 아빠가 가서 엄마는 동생이랑 안방에서 자고 있다고 하니까 그냥 얌전히 다시 잤다. 역시 엄마를 수시로 찾긴 하지만 엄마 껌딱지는 아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침대 가장자리에 누워있는 아빠를 피해 펄쩍 건너뛰어 거실로 나갔다. 밟고 가지는 않는 걸 보니 그래도 아주 기본적인 예절은 갖춘 듯하다.


10:00 사과와 바나나, 생크림 요거트를 발라 시리얼을 뿌린 빵으로 적당히 아침을 해결하고, 치카와 세수와 옷 갈아입기를 얼른 마치고 집을 나섰다. 하남 스타필드에 있는 신세계 아카데미에서 아빠랑 함께하는 체험 강좌가 예약되어 있다. 이럴 땐 엄마랑 같이 가고 싶다는 얘기를 전혀 안 한다. 아마도 '아빠와 함께 드라이브 하기'가 이 녀석의 취미 중에 하나가 된 게 아닐까 싶다.


10:40 레고와 코딩을 결합한 강좌가 시작됐다. 사실 집에서 레고는 꽤 만져보았고 코딩도 별로 어려운 수준은 아니라서 손쉽게 강좌의 목표인 반딧불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아빠가 많이 도와주긴 했다. 그래도 블록도 잘 찾고 결합도 잘하고 코딩을 하는 패드 조작도 곧잘 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해내려는 자립심이 돋보였다. 다만 강의를 하는데 선생님이 하는 말을 안 듣고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려고 해서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하라는 얘기를 10번 정도 해주었다. 끝나고는 남들 다 가는데 계속하려고 하는 특성을 보였다.


"끝늤드그...! 이제 나가야 된드그.....!!"

이렇게 이를 악물고 말하는 아빠에게 "새치기하지 마!"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그래도 끌려 나가기 전에 스스로 자기 발로 걸어 나오면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대신 젤리로 속상한 마음을 달랬다.


12:30 점심에 볶음밥을 먹고 싶다고 해서 태국식 볶음밥 요리에 도전했다. 어린이용 수저 세트를 제공하지 않는 가게라서 어른 숟가락으로 먹었는데도 꽤 자신 있게 볶음밥을 푹푹 퍼서 먹었다. 실은 원래 좋아하는 볶음밥은 집에서 아빠가 해주는 햄 야채 볶음밥이다. 오늘 먹은 메뉴는 그것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원래 안 먹는 계란과 양파와 새우까지 잔뜩 들어있었다. 다 섞어놓으니 그냥 모르고 먹었던 것 같지만 그 와중에도 눈에 확 띄는 새우만은 골라내었다. 그래도 태국식 볶음밥을 칠리소스 찍어서 한 입, 단무지와 같이 한 입을 번갈아 먹으며 거의 어른 메뉴의 절반 이상을 먹는 걸 보니 다시 키가 클 때가 되었나 보다.


13:20 서점에 갔다. 서점을 둘러보다가 '치매 예방에 최고'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미로 찾기와 숨은 그림 찾기 등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역시 어린이와 노인은 한 끗 차이인가 보다. 비슷한 종류의 어린이용 버전을 찾아 주었더니 아주 흡족한 눈치다. 결국 컬러링북과 미로 찾기와 6세용 수학 익힘책을 2만 원 주고 사서 나왔다.


13:40 아이스크림을 아빠와 나눠먹었다. 커다란 초콜릿 콘에 레인보우 알갱이를 뿌린 초코 아이스크림이다. 아빠가 많이 먹을까 봐 경쟁하듯 아이스크림을 물어뜯는다. 이러면서도 가끔 남들한테는 자기가 단 걸 안 좋아한다는데, 미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아빠만큼 단 걸 좋아하는 녀석임에 분명하다.


15:00 쇼핑몰에서 집에 돌아와 예약되어 있던 미용실로 갔다. 아빠가 그림책에 나온 대로 '짤깍짤깍 가게'에 가자고 했더니 '미용실'이라고 바로잡는 것이 영락없이 부전자전이다. 미용실에서는 쿨하게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시종일관 태블릿으로 보여주는 <바다 탐험대 옥토넛> 만화에 집중했다. 일단 집중하기 시작하면 머리를 자르든 머리카락을 털든 무념무상이다. 아마 바리깡으로 머리를 다 밀어도 모를 것이다. 근데 이것도 좀 과해서 보던 에피소드를 중간에 끊지 못하고 샴푸를 하면서 누워서도 태블릿을 봤다.


16:00 집에 오자마자 서점에서 사 온 미로 찾기와 컬러링북을 펼쳤다. 일단 하기 시작하면 질려버릴 때까지 계속할 것 같아서 미로 찾기는 하루에 5개, 컬러링북은 하루에 1개씩만 하기로 약속했다.


17:00 가족회의를 하는 동안 활발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화이트보드에 기록도 했다. 물론 자기만의 기록이다.


18:30 엄마가 차려준 저녁식사를 싹 다 비웠다. 역시 이제 클 타이밍이 된 것이 분명하다.


19:20 과장되고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을 자제하라는 지적을 엄마 아빠에게 여러 번 들었다. 그러는 사이 동생에게도 원망인지 꾸지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오빠를 향해 따지는 듯한 옹알이를 듣기도 했다.


21:00 내일 있을 기차여행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치카를 하고 잘 준비를 하는 동안 엄마에게 자주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래도 요 며칠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차분해지고 말귀도 알아듣는 모습이다. 사실 이제 밖에 엄마나 아빠랑 둘이 나가면 말도 잘 듣고 이상한 행동도 거의 하지 않는데 금방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이 아이의 생애 첫 기차여행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지 오늘보다도 더 유심히 관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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