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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Oct 05. 2022

뚜벅이 가족의 강릉 기차 여행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102일째 

10월 3일(월) 흐림  


당일치기 강릉 기차 여행을 다녀왔다. 나와 남편, 그리고 첫째. 둘째는 부모님들께서 봐주셨다. 왜 기차여행이냐? 첫째의 올해 새해 계획 중 하나가 '기차 여행'이었다. 왜 강릉이냐? KTX로 바다를 볼 수 있는 여행지 중 KTX 표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강릉은 왠지... 낭만적이니까. 그냥 가보기로 했다.  


첫째는 첫 기차여행에 들떴다. 우리도 들떴다. 몇 년만의 기차여행인가? 남편과 즉흥적으로 묵호행 고속버스를 타고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던 연애시절이 생각났다. 그래서 강원도에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묵호를 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날짜를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회의에서 내 의견은 기각됐다. 남편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여행하면 좋겠다 했고, 첫째는 우산을 쓰고 다니면 된다고 했다. 다수결에 의해 여행은 강행됐다. 아침 9시 30분 상봉에서 기차를 타고 가서 밤 8시 30분에 강릉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는 일정이었다.  


그 결과 무진장 걷고 왔다. 비는 오지 않았다. 날씨가 생각 외로 선방해서 엄마인 나는 흥분했다. 나는 걷기를 좋아하나 보다. 늘 엄청 많이 걷는 코스로 여행 계획을 짠다. 여행지에서도 웬만하면 슬슬 걸어가다 뭐 나오면 들러보고 이런 걸 좋아한다. 물론 난 이제 애엄마고 뚜벅이가 아니니까 5살 첫째를 위해 어느 정도 양보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내 스타일에 애를 맞추고 싶었다. 안목해변에서 강문해변까지의 2.5km. 소나무길 따라 쭉 가면 될 것 같았는데 자꾸 힘들고 어렵다는 남편과 첫째의 의견에 버스를 탔다. 버스 타는 것까진 좋았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내가 할머니께 양보하고 첫째에게 참으라고 하자 첫째가 징징댔고 그런 첫째를 혼내는 부분에서 남편과 나의 의견이 엇갈렸다. 남편은 내가 첫째를 혼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걷고, 쉬고, 느끼는 여행. 뭐 어려울 거 있나? 그러나 해보니 어려웠다. 될 듯 말 듯, 같이 느낄 수 있을 듯 말 듯 뭔가가 어려웠다. 혼자라면 더 재미나 여행의 홀가분함을 느낄 부분인데 아이와 남편이 있다 보니 그들 기준에 나를 맞춰야 하는 순간들 말이다. 이런 부분에선 남편이 좀 더 도와주면 좋겠다. 하지만 남편의 여행 스타일도 나와 백 프로 일치하진 않았고, 우선 남편은 첫째 편이었다. 내가 첫째를 혼내려 하면 남편이 자꾸 첫째 편을 들어서 불편한 상황이 몇 번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홀가분한 느낌이 느껴질 만하면 애를 혼내고 있었고 낭만적인 느낌이 느껴질 만하면 서로 싸우고 있었다. 남편과 여행을 복기해보니 우리가 무리한 일정의 힘든 여행을 해서라는 결론이 나왔다. 바닷가에서 애 좀 모래 놀이하라고 풀어주고, 그깟 해변 따위 한 군데만 가고, 산책 좀 하다 다리 아프면 택시 불러서 타고, 기차에서 영상도 좀 보여주고 그래도 되는데. 나처럼 첫째가 이 여행을 온전히 느끼고 즐기길 바란 건 내 욕심이었을까.  


그리고 내 마음이 무거웠던 다른 이유는 첫째의 주의 산만과 과잉행동이 유아 ADHD의 증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요 며칠 첫째가 혼났던 주된 이유고, 유치원 선생님이 연락 주셨던 이유다. 아이의 탐탁지 않은 행동들이 다 의심이 됐다. 브릭캠퍼스에선 관련 전문가들의 유튜브를 찾아보기도 했다. 모든 증상들이 다 내 아이 이야기 같았다. 기분이 안 좋고 불안했다. 남편이 찍어준 사진 속 내 얼굴도 좋지 못했다.  


어렵사리 시간을 만들고 비용을 들여 강릉까지 왔는데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여행이 될 뻔했지만 그래도 결론은 여행은 늘 행복하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여러 가지 힘든 순간들을 지나고 나니 아이도 안정되고 남편과 나의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다음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강릉 가는 기차에서 엄마에게 열 번쯤 혼난 첫째가 서울 오는 기차에선 한 번쯤 밖에 혼나지 않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가. 나는 또 다음 기차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 여행을 첫째가 떠나려 할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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