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104일째
10월 5일(수) 서늘하다
육아를 하다가 가장 불편한 순간은 내가 애에게 해를 끼치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다. 내 존재 자체가 이 아이를 위해 도움이 별로 안 되는구나 느끼게 되는 순간 말이다. 요새 그런 순간들이 몇 있다. 아이를 훈육하다 스스로 폭발하거나 지나친 걱정으로 아이의 미래를 내 멋대로 상상하는 순간들 말이다.
'나 때문인가?'
생각의 시작은 유치원 선생님과의 통화였다. 주의를 여러 번 줘도 선생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전화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 맞벌이로 일하다 둘째의 출산으로 나와 남편이 동시에 육아휴직을 한 뒤 첫째와 내가 함께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남편이 둘째를 전담하고 내가 첫째를 전담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아이가 더 성숙해지긴 커녕 모든 감각에 예민해지고 짜증이 많아졌으며 교우관계도 더 나빠진 것 같고 언어적 표현능력도 부족한 것 같다. 왜 이러지?
우리가 같이 육아휴직을 하는 게 아이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본인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밉상스럽다. 실제로 그렇다면 어쩌지? 동생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소외감을 주기는커녕 그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이기적이고 버르장머리가 없는 아이로 자라나는 떡밥을 우리가 던져주고 있는 것이라면 어쩐다? 겁이 났다.
실제로 남편이 복직을 하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힘들 거다. 하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상황이다. 남편이 복직하는 내년 1월부턴 첫째와 둘째를 온전히 내가 홀로 케어해야 한다. 그 상황이 두렵지만 한편으론 그런 상황 속에서 오빠로서 첫째로서 첫째가 깨닫고 성장하는 부분들도 분명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진지하게 지금의 이 시스템이 아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 곰곰이 여러 번 생각하게 된다.
육아의 대전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unconditional love. 아이가 말을 잘 듣던 듣지 않던 아이 스스로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이며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명제를 체감해야 한다.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나는 아이에게 가시 돋친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의 까다로운 식성과 무기력함 때문이다.
LA의 갈비의 야들야들한 부위만 잘라서 밥을 주었지만 씹다 뱉었다. 유치원에서 오늘 미아예방, 납치 예방 교육을 했다는데 뭘 배웠냐는 질문에 도통 '모르겠다'는 말 뿐이다. 놀이터에선 자기가 그려온 그림으로 만든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서 친구들과 소통을 하지 않고 내가 하자는 데로 따라주는 친구와만 놀고있었다. 첫째의 그런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원래 애들은 그렇다고 해도 속상했다. 놀이터에서 몇년째 같이 노는 친구들 주위를 빙빙 겉도는 게 느껴졌다. 그게 아니라면 다행이곘지. 만일 내가 멀쩡한 우리 아이를 괜히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다.
온갖 육아서를 읽고 깨달음을 얻으면 뭐 하나.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 도돌이표인데. 이런 일기가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나와 남편의 육아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앞이 꽉 막힌 미로에 갇혀있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