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없는 방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20일째

by 디내누

7월13일(수) 날씨: 비


조리원 내 방엔 시계, 달력, 거울이 없다. 백화점엔 시계가 없는 게 이해가 가는데, 이 방에 시계가 없는 건 이해가 잘 안 간다. 원장이 까먹었는지 시계 없는 방에서 핸드폰으로만 시간을 확인하려니 답답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지금 내 몰골이 어떤지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 몇 시인지를 빼곤 사실 다른 것들은 확인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오로지 아기와 나와의 교감이 가장 중요하기에, 요일이나 내 몰골을 체크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오랜만에 가족이나 조리원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 통화를 했다. 회사 랩탑의 비번 변경을 해결하려는데, 핸드폰을 바꾼 탓에 보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 IT팀 담당자와 통화했다. 조리원에 있는 중이라니까 화들짝 놀라더라는. 암튼 오랜만에 다시 사회인 모드를 장착하고 통화를 하고, 내일 오늘의 문제 해결을 위해 몇 가지 절차를 처리한 뒤 다시 통화를 하기로 했다. 어느덧 휴직을 한지도 3주가 다 되어간다.


6월 23일에 시작된 내 휴직은 지금 이 휴직 일지를 통해 기록되고 있다. 휴직 일지는 거진 20일이 채워졌다. 이 일지에 기록하고자 했던 건 출산과 육아뿐만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과 나. 우리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그 과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남편을 더 사랑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나는 늘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 했다. 더 일을 잘하고 싶어. 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 더 부자가 되고 싶어. 그러다 문득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난 30년간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10대부터 시작돼 30대까지 이어졌다고 친다면)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 했는데, 과연 그 시간을 통해 내가 얻은 만족은 무엇일까? 어떤 성취들을 하긴 했다. 직업을 얻고, 연봉을 얻고, 가족을 꾸렸다. 그렇지만 과연 내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었나?


나는 나를 충분히 아끼고 사랑할 수 있었나? 그래서 그 결과 행복해졌나? 그리고, "편안함에 이르렀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사처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엔 지난 30년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자신이 없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해주고 인정하는 시간.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주고 인정하는 시간이 나에겐 필요하다.


시계 없는 방에서 하루 종일 젖과의 씨름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참 대견하다. (절대 일기에 쓸 말이 없어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아니다.) 죄수복 같은 원피스를 입고, 떡진 머리를 하고 매일 같은 양말을 신어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진짜로 그렇다는 건 아니다.) 조리원은 좋은 곳이다.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고, 나 역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거참, 있는 그대로의 나 그대로 편안함에 이르기 좋은 방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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