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26일째
7월 19일 화요일 흐림
내가 첫째 아이 등원을 시킨 것이 어느덧 2주가 되었다. 오늘처럼 아침에 느리적거린 날은 9시에 헐레벌떡 나가서 버스를 타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웬만큼 적응이 됐다. 어제가 내 생일이어서 저녁에 오셨던 어머니가 집에서 주무시고 아침에도 도와주신 덕분에 더 수월하기도 했다.
내일은 드디어 아내와 둘째가 집으로 온다. 엄마가 몇 밤 자야 오는지 첫째가 해오던 카운트다운이 드디어 1이 됐다. 매일 엄마 목소리를 듣거나 영상통화를 하면서도 '진짜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한숨짓는 첫째의 표정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무려 16일이나 잘 버텼다. 기특하다.
아내와 둘째가 집으로 온다는 것은 이제 낮에도 개인 스케줄을 잡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휴직 전에 회사에 깜빡 놓고 온 외장하드도 받을 겸, 내 업무의 인수인계를 받았던 회사 후배와 이 마지막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매일 출근하던 길을 점심시간에 맞춰서 나갔다. 수없이 다녀서 눈감고도 갈 수 있을듯한 지하철 통로와 최단거리 환승 칸으로 저절로 발길이 향했다.
회사 후배는 마지막으로 본 것과 여전한 모습이었다. 하긴 실제로 아직 마지막 출근을 한지 채 한 달이 안 되었으니 별로 바뀐 게 없을 만도 했다. 그동안 있었던 회사 이야기를 들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도 함께 직면했던 업무들과 회사의 상황들이 지금은 심드렁한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느낄 수 있던 건 그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휴직을 하지 않은 멀티버스 평행세계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흠칫 놀랐다. 아직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도 했다.
집에 오는 길에 만약 내가 휴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상황일지를 가늠해보았다. 아내는 조리원에, 첫째는 유치원에, 나는 회사에. 가까이 사시는 장인 장모님은 코로나 재유행으로 감염되시고 어머니가 첫째 등 하원부터 우리 집의 거의 모든 걸 챙겨야 하는 상황. 그 와중에 몰려드는 업무.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아들에게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나. 가지 않은 길이지만 그 길이 지금보다 훨씬 끔찍하고 험난했을 것이라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오자 금세 다시 진짜 현실로 돌아왔다. 둘째 맞이할 준비를 마무리하고, 이번 주 업로드할 유튜브 영상을 만들다가 첫째 하원을 마중하러 나갔다. 이제 하원 버스에서 다른 부모님들과 마주치는 것도,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주변을 맴도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자이언트 비눗방울 세트 덕분에 잠깐이지만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피리 부는 사나이도 되어봤다. 첫째는 오늘도 영특한 면모를 뽐내며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해 주었고, 같이 분리수거와 샤워를 한 뒤에 유부초밥을 만들어 먹고 디저트까지 맛나게 해치웠다.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이제 자고 일어나면 엄마와 동생이 오는 날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재우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마 지금 내가 가는 길은 사람이 적게 간 길일 것이다. 결혼을 하는 사람도, 애를 둘씩 낳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육아 휴직은커녕 '노키즈존'을 찾아간다. 하지만 난 이미 떠나왔고 돌이킬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나는 행복으로 가겠다. 최대한 열심히.
문득 거의 20년 전이지만 수능 지문으로 나왔던 시가 떠오른다.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