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집으로 왔다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27일째

by 디내누

7월 20일(수) 날씨: 습하고 살짝 우중충한 여름 날씨


조리원 퇴소 날이다. 아침 수유콜은 살짝 패스했다. 앞으로 수많은 수유를 할 텐데 오늘쯤이야. 대신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좌훈기를 하고, 짐을 꾸렸다. 입고 온 옷 그대로, 둘째가 나에게 안겼다. 집에 가는 길에 소아과에 들러 피내용 BCG 주사를 맞힐 참이다. 오래돼 보이는 낡고 허름한 소아과에 들어섰다. 피내용을 맞힐 수 있는 소아과가 얼마 없기 때문에 우리 집 근처 피내용 접종이 가능한 일부 병원 중 한 곳에 갔다. 환갑이 넘어보이는 나이 드신 의사 선생님이 진료를 보고 계셨다.


"신생아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갑작스러운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사레들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정답을 알려주셨다. 이어서 첫째가 있냐, 몇 살이냐 물으셨다. 다섯 살이라고 대답하자 마찬가지로 걔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뭘 지 물어보셨다. 역시 대답을 못하자 "차 조심입니다."라고 정답을 알려주셨다. 아, 그렇구나! 뭔가 신뢰감이 확 드는 질문과 답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BCG 접종을 마치고 아이를 진정시키며 의사 선생님이 일종의 썰을 푸셨다. 모든 아이는 아이마다의 특성이 있는데 획일적으로 인터넷이나 책에 나와있는 것을 정답이라고 여기고 일반화시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 아이가 아플 때 카더라를 믿지 말고 전문의를 찾아 상담하되 소아과를 찾을 땐 너무 젊지 않고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경륜 있는 의사를 찾아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 말들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의사 선생님께 점점 빠져들었으나 남편 핸드폰으로 차 빼라는 전화가 와서 우리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두툼한 겉싸개에 쌓인, 누가 봐도 갓 태어난 신생아인 아이를 안고 우리 집에 도착했다. 애지중지 소중하게, 바람 불면 날아갈까 혹시나 실수로 놓칠까 노심초사하며 집에 들어서, 미리 마련해둔 아기침대에 아이를 뉘었다. 아직 첫째가 집에 올 때까진 시간이 여유 있게 남아있었다. 남편도 있고 시어머니도 와주셔서 여유롭게 오후를 보내다 첫째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갔다.


유치원 버스 안에서부터 엄마를 발견하고 들뜬 첫째의 표정. 늘 여유롭게 마지막 즈음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지만, 오늘따라 아이들을 밀치며 먼저 내리더니 나를 붙잡고 깡충깡충 뛴다. 나 또한 너무 반가워 얼싸안고 좋아했다. 꼭 안고, 손잡고 놀이터까지 알콩달콩 걸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 좋았는데, 첫째와 집에 올라온 뒤부터는 다시 노심초사하며 둘 사이에서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첫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꺼내 주고, 잠시 같이 놀아줄 때쯤 둘째가 일어나 울며 보챘다. 남편이 안아주고 달래주어도 소용없었다. 난 당장 둘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첫째는 내가 화장실에만 가도 거슬려했다. 나 역시 오늘만큼은 온전히 첫째를 위해 내 모든 시간을 내주고 싶었다. 아직 몸이 완전 편하진 않지만, 난 '애 둘' 엄마니까, 열심히 첫째를 쫓아다니며 놀아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밥도 같이 먹고, 첫째가 무수한 밤마다 나와 함께 하고 싶었던 '넘버블록스' 놀이도 같이해주고 치카도 시켜주었다.


중간에 둘째가 또 한 번 너무 울 때 내가 살포시 첫째에게 "엄마 잠깐 애기 좀 보고 올까? 너무 우는 것 같다"라고 말하자 첫째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안돼"라고 했다. 사실 남편이 알아서 잘 진정시킬 거라고 생각했기에 나 역시 내가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았어, 대신 정말 정말 아기가 많이 힘들어하고 엄마가 가야 될 땐, 그땐 잠깐 다녀와도 이해해 줘야 해. 알았지?"라고 말하자 첫째는 "알았어"라고 했다.


조금 거슬리거나 어색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있으면 첫째가 하는 행동들을 난 잘 알고 있다. 하지 말라는 행동들을 대놓고 하거나 왜 저러지 싶은 과장된 액션과 말을 하는 것 등이다. 오늘 계속 안방에 있던 둘째가 잠시 깨었을 때 거실로 데려와 역류방지 쿠션에 살포시 눕히고 온 가족이 둘러싸고 구경 중이었을 때, 그때 첫째가 하는 행동들이 그러했다. ㅎㅎ 갑자기 둘째 주변을 엉거주춤 걸어 다니고 둘째 바로 근처에 있는 소파에서 쿵쿵 뛰어 아빠는 외마디 소리(라고 하기엔 첫째를 위협할 정도의,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외침)를 질렀다. 첫째는 분명 위협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릴
경쟁자가 나타났다.

조리원에서 지낼 때 남편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아이가 자다가 울면서 깨서 방으로 갔는데 무서운 꿈을 꿨다며 서럽게 울더라는 것이다. 무슨 꿈이었냐고 물어보자 아이는 "꿈에 호랑이가 잡아먹으려고 했어... 엉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랑이? 남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 역시 남편처럼 박장대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째가 호랑이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메타포인가? 며칠 뒤 엄마와 집에 올 둘째가 본인의 안위를 위협할 것이라는 걸 감지한 예지몽인 것인가?


실제로 둘째는 첫째를 위협할만한 무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엄마 쮸쮸에 대한 갈망이었다. 수유는 엄마만 할 수 있으니까. 첫째와는 달리 엄마 쮸쮸에 대한 애착이 큰 그녀. 과연 이 둘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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