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41일째
8월 3일 수요일 해밀
오늘처럼 몸도 마음도 지치는 날에는 새옹지마를 생각한다. 원래 이건 안 좋은 일이 나중에 좋은 일로 이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좋은 일도 안 좋은 일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치만 난 그냥 안 좋을 때만 이게 다 나중에 좋은 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위안을 하기 위해 써먹는다.
아침 일찍부터 고단한 일정이었다. 첫째를 데리고 대학병원 안과 진료를 가야 했던 나는 새벽 수유에서 면제를 받고 예전 출근시간 즈음에 일어났다. 어제의 기대와 달리 둘째의 새벽잠은 그다지 늘어난 것 같지 않았고 아내는 3시간 간격으로 분유를 타 먹이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잠을 줄이고 밤에도 더 일찍 재우는 패턴을 만들자고 하는데 글쎄, 어쨌거나 당분간 통잠은 요원해 보인다.
대학 병원에 부랴부랴 도착해 오전 내내 첫째의 안과 검진과 검사들을 받게 했다. 눈에 무슨 병이 있는 것은 아니고 시력 때문이다. 전에 어린이집 출장 검사나 동네에서 받은 영유아 검진에서도 공통적으로 시력이 많이 좋지 않다는 소견을 들었고 동네 안과에서 시력을 측정했을 때도 별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고작 시력 가지고 무슨 대학병원씩이나 가냐고 할 수 있지만 혹시 시신경에 문제가 있다거나 다른 기저질환이 원인일 수도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으러 온 것이다. 5살부터 안경을 씌우기는 아내도 나도 정말 싫었던지라 동네 안과에서 안경을 쓰라는 소견을 준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증이 필요했다.
안과 검진은 생각보다 힘들고 오래 걸렸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동공 반응을 억제하는 '조절 마비제'라는 것을 눈에 넣고 해야 하는데, 5살 아이에게 너무 무리한 과정이다. 일단 시력검사 외에 카메라같은 것을 보면서 찍는 눈동자 사진 촬영을 2번, 기계에 얼굴을 대고 캡처하듯이 찍는 촬영과 시선을 따라가는 검사, 그것들을 하는 사이 '조절 마비제'를 15분에 한 번씩 4번이나 투여해야 했다. 마카롱도 사주고 중간에 병원 구경도 시켜주다가 아내와 영상통화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다행히 점심시간 전에 검사와 진료를 끝마칠 수 있었다. 결과는 결국 시력이 상당히 안 좋다는 것. 안경을 맞출 수 있는 처방전도 받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늦게나마 점심시간 맞춰서 데려다주고 맥도날드DT에서 햄버거를 사 오며 생각에 잠겼다. 5살부터 안경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지금은 안경을 쓰긴 쓰지만 어릴 때는 시력이 1.5/1.5 인 게 자랑이었다. 지금도 스마트폰 때문에 나빠진 것이고 그래도 시력이 약 0.5 정도로 안경 없이도 다닐 수는 있는 수준이다.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니 대부분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즈음에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 같았다. 초등학교 입학도 전부터 안경을 쓴 사람은 주변에 딱 2명. 고등학교 친구 중 한 명과 아내다. 둘 다 지금은 렌즈삽입술을 하고 안경을 안 쓰지만 원래는 마이너스 10도 넘는 눈뜬장님이었고 엄청나게 두꺼운 안경을 썼다고 한다. 심지어 그 둘도 5살부터 안경을 쓰지는 않았다.
안경을 쓰면 얼굴 변형이 올 수도 있다. 무겁고 걸리적거리고 불편하다. 아직 어린애인데 신경 못 쓰고 움직이다 부딪히면 안경 때문에 다칠지도 모른다. 안경 쓴 얼굴은 평소 외모에 크게 마이너스가 된다.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을 새옹지마로 억지로 달래 보려 노력했다. 시력이 너무 나쁘면 그걸로 군대를 현역으로 안 갈 수도 있다. 눈이 아주 나쁜 내 친구는 실제로 신체검사 4급을 받고 방산업체 근무를 했다. 학창 시절에 얼굴이 너무 잘나서 인기가 많고 연애를 하다가 옆길로 새느니 차라리 안경으로 숨겨두었다가 성인이 된 뒤에 안경을 벗고 외모 재평가를 받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옛날에는 시력이 나쁘면 평생 그걸 견디며 살아야 했지만 이제는 라식이니 라섹이니 렌즈삽입술이니 방법이 다 있다. 현대의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앞으로 20년 안에 어떤 천재 과학자가 시력이 좋아지는 물질을 발견해 노벨상을 받지 않을까.
이렇게 번아웃이 온 날이라 내가 인내심이 부족해진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방법으로 길들여져 수시로 안아줘야만 하는 아기가 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오늘은 둘째도 나를 힘들게 했다. 아직 먹을 시간도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있는 힘껏 울어재끼면서 내가 하는 어떤 방법으로도 쉽사리 달래지지 않았고, 겨우겨우 달래서 재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나 울기를 반복했다. 내가 아기 좀 잘 보는구나 생각하던 어제까지의 나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며칠 전만 해도 순한 아기라고 믿었던 우리 둘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내는 첫째 때처럼 수면 교육을 강압적으로 시키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사실 그때는 멋모르고 아기를 책과 유튜브를 보면서 키울 때라 투박하게 하긴 했지만 어쨌든 수면 시간에 배고픔, 트림, 기저귀 등 불편한 문제만 해결되면 그 뒤론 아기가 아무리 울어도 가서 달래주지 않는 방식으로 수면교육을 했었다. 30분 정도 울다가 지쳐 잠든 날이 며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첫째는 수면교육이 잘 되었고 돌 때쯤부터는 자기 방에서 혼자 잘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내 주변에 항상 물어보아도 우리 첫째만큼 독립적인 수면 습관을 가진 경우는 매우 보기 드물다.
이것도 새옹지마라고, 오늘의 울림이 내일의 독립적인 수면으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설득하려면 다툼이 될 것이다. 오늘은 몸도 마음도 더는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자기가 맡아서 해보겠다는 아내에게 둘째를 맡기고 나는 잠시 나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다.